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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부라이프 May 09. 2022

대전 전세살이

추억 속 집 시리즈

2005년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경기도에서 살면서 대전이 궁금한 적이 없다. 가 본 적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이다. 남편이 회사 발령을 받으면서 대전이란 곳을 처음 알게 됐다. 남편은 대전이 우리나라의 중심에 있어서 어디든 여행 가기 좋다며 위로와 설득을 했다.  경기도까지 2시간밖에 안 걸리니 친정과 시댁 모두 매주 올 것이라고 했다. 지키지 못할 말이라는 건 알았다. 남편도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는 것이리라.      


사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은 별로 없었다. 새로운 곳을 가보는 즐거움도 있으니 말이다. 이동할 때가 되었다는 여자의 직감이 발동했다. 대전으로 가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하는 모든 과정도 편안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결혼 8년 차의 아이 셋 딸린 베테랑 주부에게 이사, 그까짓 거였다. 한 달 내내 이웃들과 송별회를 했다.      


무더운 여름 7월의 한낮에 집을 보러 갔고, 9월에 이사를 했다. 아파트 단지에는 큰 나무들이 많았고, 시원한 그늘이 곳곳에 있다. 아파트 공동 현관으로 나가면 바로 앞에 자그마한 놀이터가 있고 5분만 걸어가면 단지 내에 초등학교가 있다. 대전에서 유명한 ‘엑스포코아’가 있고, 단지 뒤쪽으로 갑천과 자전거 도로도 잘 갖추어져 있다. ‘엑스포코아’는 반찬가게부터 수입 옷가게, 신발가게, 이불가게, 가구점, 학원, 은행까지 없는 것이 없는 종합 만물 상가다. 아이들이 뛰어놀 공원도 많고, 아줌마의 신나는 놀이터까지 단지 앞에 있으니 애도 좋고, 나도 좋다.      

 

세련된 인테리어가 돼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전에 살던 곳보다 조금 더 평수가 늘어서 같은 살림살이를 들여놔도 집에는 공간이 남았다. 여백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가구를 늘이지 않았다. 널찍한 거실 한가운데에서 초등학교 1학년이 된 8살 첫째, 4살 둘째, 5개월 셋째가 실컷 뒹굴었다. 방 3개의 32평 아파트는 우리 가족의 충분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아이들은 학교와 유치원에서 친구들을 사귀었고, 나도 친한 이웃이 생겼다. 학교, 놀이터, 집, 교회를 신나게 돌아다니며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2년이 지나, 집주인이 집을 판다며 다른 집을 알아보라고 했다. 아쉬웠다.     


32평과 49평의 전세 가격이 동일했다. 우리는 이왕 전세 사는 거 더 넓은 집으로 가보자며 49평 집을 계약했다. 두 아들들의 방을 꾸며주고 커다란 엔틱 침대를 샀다. 안방에는 널찍한 침대와 화장대만 두었고, 장롱을 다른 방에 두어서 옷방으로 꾸몄다. 평수가 늘자 살림이 늘었다. 청소하기는 더 어려워졌지만 넓은 공간이 주는 여유가 있었다. 2년이 또 지났다. 전세금이 올랐고, 회사에서 받은 전세대출의 조건이 변경되어 국민주택규모로 다시 옮겨야 했다.  또 아쉬웠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대전에 처음 왔을 때와 같은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하는 건데, 4년 동안 아이들도 쑥쑥 컸고, 나도 넓은 집에 미련이 남았다.  


고를 수 있는 전셋집이 별로 없었다. 같은 평수라도 단지마다 구조가 다르니 새로운 시도를 해 보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좁은 집에서 넓은 집으로 옮기는 것은 수월하나, 넓은 집에서 좁은 집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큰 집에 여유롭게 있었던 가구들은 공간을 더 좁게 만드는 애물단지가 됐고, 늘어난 아이들의 물건은 1차 처리 대상이 되었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밀려왔다. 더욱이 급하게 얻은 집은 층이 낮고 주변에 둘러있는 나무들 때문에 햇볕이 잘 들지 않았다. 낮에도 어두웠고, 3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겨울에는 집안에 있는 대도 스산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뼛속까지 추웠다. 없던 산후풍이 생기는 것 같았다. 다행히 여름에는 시원했지만, 층이 낮아 벌레가 많았다. 초등학교가 바로 앞에 있어서 걸어서 1분이면 갈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아이들이 대안학교로 옮기는 바람에 큰 장점도 아니었다. 집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큰 아들의 사춘기가 시작되었고, 집에서의 시간이 행복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통학 기사 노릇에 지쳐서 집에 오면 슬라임처럼 늘어졌다. 빨리 전세 기한이 끝나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섯 식구의 벌여놓은 살림을 싸고 푸는 일에 엄두가 나질 않았다. 결혼 14년, 이 집 저 집 이사 다니는 것이 싫어졌다.


2011년 대전으로 온 지 6년이 지나, 우리는 또다시 집을 보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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