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제주도 푸른밤

#8 제주도 푸른밤

by 박시원

제주도 푸른 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도시의 침묵 보다는 바다의 속삭임이 좋아요.

이 노래는 1988년에 발매 되었고 지금까지도 제주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다.


현대를 사는 바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직도 이 노랫말이 들려오면 파도소리가 가슴 깊은 곳에서 일렁이며 당장이라도 제주도로 날아가고 싶어진다.


나의 첫 제주도는 2006년 겨울이었다.

그때는 여행의 설렘을 안고 창식이, 정연이, 형주와 무작정 떠났다.

그저 닥치는 대로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녔다. 어디가 어딘지도 몰랐고 지금이야 일정 다 정해놓고 충분히 조사해서 이미 어떤 풍경을 볼지 머릿속으로 그려놓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아니었다.


그 후로도 제주도를 많이 찾았지만 그때의 첫 제주도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추운 겨울과 어울리지 않는 유난히도 푸른 바다와 하늘, 새벽녘에 눈 비비고 억지로 오른 성산 일출봉, 그리고 시린 바람에 후드 모자를 뒤집어쓰고 검은 하늘의 별을 보며 언덕에서 구워 먹었던 바비큐, 밤하늘과 함께 하는 낭만적인 바비큐 파티였다.


눈부시게 맑았던 어느 늦은 아침 차안의 친구들은 죽은 듯 널브러져 있고 나무가 우거진 길을 홀로 운전을 하며 달렸던 그 순간, 나 혼자 그 모든 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내가 두 번째로 제주도를 찾았을 때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가 찾았던 섭지코지는 새로 들어선 콘도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었고 한적한 바닷가에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식당과 이익을 취하려는 상인들로 넘쳐났다.

그리고 중국인 관광객을 비롯해 수많은 관광객으로 어딜 가나 북새통이 되어버렸다.

처음과 같은 기분을 두 번 다시 느낄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주도를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남자는 늘 첫사랑을 못 잊는 법이니까.


가을이 시작되고 나는 다시 한 번 제주도 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을이 오면 가을의 고향에서 불어온 바람에 비염을 가진 코가 맹렬하게 반응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마음 한쪽 구석이 일렁인다. 그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DNA가 솟구친다.

봄의 제주도, 여름의 제주도, 겨울의 제주도를 경험했지만 가을은 처음이었다.


가을을 품은 제주도가 궁금했다.

아직 여름을 잃지는 않았지만 겨울을 준비하는 풍경이 곳곳에 보인다.

밭의 경계를 구분 짓는 작은 화강암 돌담들은 여전했다. 자연이 선물한 것이 소품이 되어 그 자연을 더 빛내주고 있었다.

용눈이오름 위로 가을 억새가 춤을 춘다. 갈대숲에 노을이 떨어지면 세상은 잠시 멈춘다.

미로 속에 갇힌 나

돌하르방 미로?

차를 몰고 달리다 보니 돌미로 라고 쓰인 간판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별 생각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래 한 번 가보자.'

나는 미로 속으로 들어갔다. 손에 들린 지도를 한 번 훑어보았다.

전혀 알 수 없었다.


간단한 미로 지도조차도 잘 보지 못하는 나는 길치다.


어쨌든 이 정도 미로는 초등학생도 나올 수 있는 수준이라 손에 들린 지도 볼 생각도 없었다.

천천히 걸었다. 당장 출구를 찾겠다는 마음은 크게 없었다.

걷다보면 자연스레 출구가 나올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한 커플이 손을 꼭 잡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지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여자 둘, 그리고 남자 셋. 시간이 흘렀고 미로 속에 남은 사람은 이제 나 하나같았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했다.

그저 돌다보면 나올 것 같았던 출구는 도무지 나올 기미가 없었다.


그제야 나는 지도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음이 급했다. 당장 빠져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커졌다.

지도 아래 구석에는 ‘출구를 찾지 못할시 아래 번호로 전화주세요.’ 라고 쓰여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흘렀다. 간간히 보이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지쳐갔다.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가을 햇빛이 여름날 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아무리 길치라지만 이건 좀 너무 한 건 아닐까.

다른 이들은 너무나 쉽게 찾아 나가는데 나만 이렇게 꼬여 버렸다.

마치 내 인생처럼…….


이제는 선택해야 했다. 한 번 바보 취급당하고 이곳을 나가던지 아니면 문 닫을 때 끌려 나가던지. 어차피 망신당하는 건 마찬가지다.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볼 테지만 그것도 나쁘지 만은 않다.

전화하기로 마음먹고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산을 움직일 정도의 큰 웅성임이 느껴졌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순식간에 하나에서 수많은 소리로 갈라지기 시작했고 좁은 협곡으로 물이 쏟아져 내려오듯 사람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처럼 강한 동기부여가 되어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들에게 휩쓸려 버렸다.

그들은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었다.

이리치고 저리 치이며 그저 떠내려갔다. 내 의지도, 나의 힘도 아니었다.

미로를 꽉 채워 오는 그 사이로 역행 할 자신은 없었다.

그냥 그들을 따라 걸었다. 그들도 어디로 가는지 누가 이끌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게 몇 분을 걷다 보니 낯선 곳이 나왔고 이어 출구가 나왔다. 너무나 쉽게 나와 버렸다.

기쁘기도 하지만 황당하고 허무하기도 했다.


안도감과 함께 한 숨이 절로 나왔다.


나를 우리를 출구로 이끈 리더는 누구였을까. 생각해 보았다. 반장? 선생님? 아니면 가이드?

그 누구도 아니었다.

학생들도 모르고 있었던 리더는 바로 우리 모두다.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이다. 혼자서 어딘가를 찾아갈 때는 정말 많이 헤매게 된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할 때 더 쉽게 길을 찾거나 어려운 일을 해결하기도 한다. 심지어 아무 생각 없이 노닥거리며 걷기만 했는데 저절로 길이 우리 앞에 나오기도 한다.


때론 혼자보다 여럿이 할 때 알 수 없는 힘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힘이 있다. 단지 우리가 모를 뿐이다.

그 힘은 혼자 일 때 절대로 나오지 않지만 누군가와 함께 뒤섞이면 엄청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순간을 가끔 경험하지만 잘 모르고 지나쳐 버리고 만다.

나는 그 순간을 나의 우스운 길치능력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혼자만을 고집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때론 내 옆에 함께 하는 사람들의 고마움을 잠시 잊고 있었던 거 같다.

그들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힘이 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제주도의 한 미로 공원에서 느꼈다.


스쿠터 "소녀"

벌써 2년 전 일이다.

여행 가서 여자 꼬시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가는 곳에 여자가 있길 바라는 것은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남자의 본능이랄까.

나는 자칭 불운의 아이콘이다. 특히나 여자에 있어서는 더욱 심하다.

고립된 생활이 지겹기도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 제주도 게스트 하우스의 바비큐 파티에 참석한 적 있는데 그날따라 여자가 이상하리만큼 없었다.


"오늘 진짜 이상하네요. 원래 여자가 더 많은데……."


내 주변에 앉아 있는 시커먼 남자들에게 전하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장의 말이다.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다.

물론 그 불운은 외국에서는 어느 정도 사라지는 것 같다. 한국에서만 겪는 불운이라면 불운이다.

그 날은 여행의 마지막 날. 역시나 아무 일도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늘 그렇듯, 나는 영화 같은 로맨스를 꿈꾼다.

젊을 때야 다들 감성적이다, 몽상가다 하지만 나이가 먹어가니 철없다, 아직도 그러냐. 하는 말들뿐이다.

나이가 먹어 가면 모든 면에서 수학처럼 이성적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걸까. 그래야 어른인걸까.

아침 일찍 게스트 하우스를 나왔다.

차를 몰고 나가는데 갑자기 스쿠터 한 대가 나타났다. 휘청 거리며 간발의 차이로 내 차를 피해갔다.

다행이었다. 자칫하면 사고가 날 수 있었다.

핑크색 스쿠터를 운전하는 건 여자였다. 손짓으로 미안하다는 표현을 한 뒤 쿨하게 가던 길을 갔다.


"아,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나는 구시렁거리며 다시 중문단지로 향했다.

중문단지에서 아침을 먹을 만한 곳을 찾고 있다 보니 익숙한 스쿠터가 보였다

"어!"

그 여자였다.

“저 여자는 왜 이리 돌아다니는 거야?”


나는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밥을 먹었다. 그리고 나와서 지도를 펼친 뒤 갈만한 곳을 찾았다.

오늘 일정은 협재해수욕장 갔다가 공항으로 간다. 하지만 그때까지 시간이 남아 갈만한 곳이 필요했다.

중문단지를 이리저리 차를 몰고 돌다가 외관에 혹해서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형사 가제트 머릿속 같아 보이는 외부를 보면 누구라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들이었다. 평생 머리카락을 잘라 본 적 없는 여자도 있었고 키가 2m70cm 나 되는 남자도 있었다.


좀 들어가다 보니 작은 열쇠 구멍이 있었다.

이것도 신기한 건가, 하고 한쪽 눈을 찡그리며 구멍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맑고 투명한 피부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안아주고 싶은 작은 어깨를 가진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아까 내 차를 향해 돌진했던 스쿠터를 탄 여자였다. 아니, 소녀.

손에는 헬멧이 쥐어져 있었고 목에는 큰 스카프를 메고 있었다.

나는 잠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반대쪽 구멍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얼굴을 뗐다.

잠시 후 그녀가 돌아서 나왔다. 나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는데 초콜릿 덩어리를 꿀꺽 삼킨 듯 강렬했다.

나는 거리를 두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뭐, 쫓아가려고 한 건 아니고 가는 방향이 같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 많던 사람들이 싹 사라졌다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녀, 그리고 나뿐 다른 이들은 없었다.

그녀가 저만치 서서 턱을 괴고 한 작품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도 멀리서 멈춰 서서 작품을 구경하는 척 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 건네 볼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주변에 사람도 없었고 아까 스쿠터 사고 날 뻔 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누구 인가, 우유부단하며 자신감 없고 소심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간 아닌가.

결국 출구가 나올 때까지 뒤만 졸졸 따라 다녔다.

밖으로 나온 스쿠터 소녀는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고민만 계속 하다 다시 돌아 주차장으로 갔다.


‘얼어 죽을 여자는 무슨.’

지도를 폈다.

얼마 후,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눈을 찡그려 다시 확인하니 스쿠터 소녀였다. 갑자기 심장이 쿵쾅 거리기 시작했다.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설마…….


“저 혹시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전화번호 좀 알려주실래요?”

그녀가 내게와 이렇게 말을 건넨다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봤지만 그녀의 스쿠터가 바로 옆에 세워져 있었다.

그녀 역시 지도를 폈다. 그 순간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우린 0.5초간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녀가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당황한 나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한 뒤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냅다 차를 몰았다.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말이다.

이제 이런 나에게 실망하는 것도 지겹다. 늘 그러니까.

중문단지에서 차를 몰고 협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운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제주도에서 만큼은 다르다. 창문을 열면 자연 그대로의 산소가 몸속 깊이 들어온다.

서울 공기가 인스턴트 음식이라면 제주도는 자연밥상 이랄까.

중심지를 벗어나면 수많은 차와, 건물들도 없다. 억새언덕과 작은 화강암 돌담이 길게 늘어진 집들, 검은색을 띄는 밭들, 그리고 바다.

자연은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 진다.

언제부턴가 제주도하면 힐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사람들은 지친 마음을 정리하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 제주도를 찾는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제주도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렸다.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어머니 같은 곳이다.

50분 남짓을 달려 협재 해수욕장 바로 맞은편에 있는 한림공원으로 갔다. 날씨도 좋았고 천천히 공원을 둘러보고 싶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데 그녀와 마주쳤다.

나는 놀라 심장이 멎을 뻔했다.

스쿠터를 타고 어떻게 나와 같은 시간에 도착한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폭주족인가?

나는 거대한 야자수가 길게 세워진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가 온다면 반드시 말을 시키겠다는 다짐도 함께.

이건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했지만 나는 일단 걸었다. 꽃, 정원, 동굴이 나왔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계속 뒤를 돌아봤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말 한마디 못 걸어본 내가 야속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호박이 주렁주렁 달린 초가집을 지나자 다양한 색의 호박을 액자처럼 생긴 큰 수레에 장식해놓은 것이 예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코너를 돌자 나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곳 벤치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 계획된 거야. 맞죠?"

내가 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뭐라고 말을 시켜야 하지? 날 이상하게 보면 어쩌지? 하지만 이건 운명이야.'


나는 일단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분명 그녀가 거기로 다시 나올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곳으로 나오지 않았다. 거꾸로 돌아서 갈 리도 없는데 정말 이상했다.

입구에서도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째서 나보다 더 빨리 여기 와 있던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걸었다. 서서히 공원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또 그녀를 마주쳤다. 화장실에서 그녀가 나오고 있었고 나는 들어가고 있었다.

‘왜 자꾸 화장실에서 만나는 거야 제길!’


그녀도 계속해서 나와 마주치자 민망해하는 눈치였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하고 공원을 빠져나왔다.

만약 위에 누군가가 내게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거라면 아마도 지금쯤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것이다.

뭐 저런 놈이 있냐면서…….

협재 해수욕장을 끝으로 제주도 여행이 막을 내렸다.

나는 여행이 끝날 때면 늘 아쉬움을 느낀다. 마치 영혼을 그곳에 두고 오는 기분이랄까.

공항으로 가기 위해 주차장에 온 순간 나는 깊은 한숨이 내 쉴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나타난 핑크색 스쿠터.

물론 한림공원 갔다가 당연히 이곳을 들리겠지만, 자꾸 마주치는 우리는 아마도 엄청난 인연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번만은 절대로 그냥 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은 가고 비행기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가야 했다.

‘근데 그녀가 나타나면 어쩌지?’

젠장, 그녀가 나타나도 걱정, 나타나지 않아도 걱정이다.

이젠 정말 가야했다.

비행기를 놓쳐도 기다려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내가 그럴 주접이 아니니까.

주차장 밖으로 나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다가 사고가 날 뻔했다.

이제 정말 포기해야 했다.

나는 갑자기 차를 돌렸다.

편의점에 들러 캔 커피와 초콜릿(비싼 거)를 사서 그녀의 스쿠터 헬멧에 넣었다.

차를 뒤져 공백이 그나마 많은 종이를 뜯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자꾸 만나게 되서 이렇게 쪽지를 씁니다.

혹시 아실지 모르지만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에서부터 계속 마주쳤어요. 아침에 제 차에 박으려고 했던 거 기억나세요? 그것도 저였어요. 아까 만났을 땐 정말 반가웠고 아는 척을 하고 싶었는데 용기가 없었네요.

마지막으로 용기 내어 여기서 기다렸지만 저에게 시간이 없어서 정말 아쉽네요.

연락처는 남기지 않을게요. 인연이면 언젠가 다시 만나겠죠.

제주도의 아름다움은 제주도에 남겨둬야 하니까요.

이게 무슨…….

쓰고 나니 괜스레 창피하다. 허세 가득한 내용의 편지.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기도 하고.

쪽지를 구겨서 버리려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폈다.

대신 연락처를 적지 않았다.

나름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마치 영화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바다였고, 여행 중이었고, 제주도였고, 그래서 완전히 심취해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그래도 되는 거다.

멋지긴 개뿔. 연락처 아니 이름이라도 썼어야 했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어야 하니까. 인생이란 그런 거지 뭐.


인생은 결코 극적인 반전이나 엄청난 행운이 저절로 찾아오는 영화가 아니다. 무엇이든지 노력해야 얻어 진다는 걸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된다.

어쨌든 그녀에게 좋은 기억 하나 선물 해주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하지만 마음은 쓰리다.

당연히 그녀를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 하나는 그녀가 내 사진 속에 담겨 있다는 거다.

우연히 찍은 호박들 사진 속에 그녀가 앉아 있는 모습 있다. 비록 옆모습이지만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그녀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연락처를 남겼더라면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며 설레 일 수 있지 않았을까.


많은 후회와 아쉬움이 남지만 괜찮다. 아직도 그 곳에서 일어났던 작은 일들이 신비롭고 꿈만 같기 때문이다.

이 글에 다 담지는 못했지만 내가 했던 여행들을 모두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 하면 어떤 단어가 적합할까 고민했다.

그것은 바로 그리움이다.

내게 그리움은 늘 두려운 존재다. 마음이 이상하게 지기 때문이다. 슬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쁜 것도 아니다.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의 집합체다.

나는 그곳에 나를 두고 왔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그립다. 그곳이 그립다.

문득 얼마 전 다녀온 제주도에서 창식이가 컴컴한 밤 바닷가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형,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리워 그때가……."

“그래,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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