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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원 Sep 15. 2016

2화. 할머니의 봄날은 돌아오지 않았다

구겨지지 않은 할머니의 신발 (마지막 이야기)

구겨지지 않은 할머니의 신발


어린 시절부터 무수히 생각해보았던 ‘죽음’

사실 죽음과 삶은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당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오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죽음은 그저 ‘사라짐’ 일까.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  아무런 의미 없는 세계 말이다

정말로 우리가 사는 현실이라는 세계에서의 사라짐은 단지 그 존재가 유에서 무로 돌아가는 것일까?


추석을 하루 앞둔 오늘 할머니의 삼우제를 지내고 왔다.

슬프게도 외할머니는 자신의 생일날 우리에게 작별을 고했다.

신을 믿었고 그에게 충실했던 할머니, 남에게 나쁜 소리 한 번 듣지 않았던 우리 할머니에게 왜 그 신은 가혹한 고통을 내렸을까.

나의 외할머니는 수년 전부터 한쪽 눈의 시력이 점차 사라져 갔고 몸도 덩달아 나빠져만 갔다.

딱히 큰 의학적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오래된 몸이란 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니까.

문제는 손, 오래전부터 할머니의 손은 이유도 없이 가렵고 건조해져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나고 급기야 손을 쓸 수조차 없었다. 그 불편함을 어찌 상상할 수 있으랴.

아마도 내가 추측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삼촌을 사고로 잃으시고 손마저 제대로 쓸 수 조차 없으면서 삶의 대한 의욕이 사라져 갔을 것이다.

몸은 대체로 정신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함께 악화되었을 거라 짐작한다.

사실 여기까지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수개월 전부터 온몸에 엄청난 물집들이 잡혀 터지길 반복하고 살에 손을 댈 수조차 없을 정도로 아파하셨다.

이미 몸과 정신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졌지만 한 가지 ‘고통’만은 느낄 수 있으셨다.

말도 못 하시고 눈도 뜰 수 없는 상태에서 고통만이 할머니를 찾아왔다.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신을 믿는 이모들에게 신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왜 신이 자신을 그토록 믿었던 사람에게 그런 고통을 내리냐고 그래서 신은 있을 수 없다고 말이다.

아니, 나는 영혼 자체를 믿지 않았다. 멋지게 달리던 자동차가 폐차장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듯 그렇게 인간도 사라지는 거라고 우주적 관점에서 그저 먼지 하나가 사라지는 것 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삼우제를 지내고 돌아와 가을볕이 따가운 늦은 오후 할머니의 옷과 몇 번 신지 않은 듯 보이는 신발을 태웠다.

할머니의 신발 뒤는 구겨지지 않고 깨끗했다.  이모들이 사준 신발을 신을 수 없었던 할머니.

할머니의 딱 맞는 신발을 보니 언젠가 우리 집에 오셨던 날이 떠오른다.

그날도 아마 반팔이 필요한 어느 가을날이었을 것이다. 내가 충남 서천으로 달려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셔왔다.

“할머니 왜 이렇게 신발이 커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가, 나는 이게 편여.”

큰 신발을 구겨 신은 채 질질 끌어 신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내가 재차 불편하지 않냐고 물으니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셨다.

“괜찮여. 아무 시랑도 안혀.”

누구에게나 저마다 자신만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 사이즈보다 큰 신발을 구겨 신었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신발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옷과 신발은 내 속도 모른 체 활활 타올랐다.

좀 더 잘 해드릴걸. 왜 그것밖에 못했을까. 언제나처럼 뒤늦은 후회를 한다.

잠자리하나 가 뜨겁지도 않은지 불길을 휘휘 젓는 내 팔 위에 앉았다. 내가 팔을 움직여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붙어있었다.

연기가 내 쪽으로 올라치면 갑자기 바람이 불어 연기를 저만치 밀어냈다.

그래 우연일 수 있지.

그리고 마지막 불꽃 하나가 오랫동안 타올랐다가 결국엔 사그라졌다.

“할머니 그동안 수고했어요.”

내가 눈물을 참으며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존재에 대해 전혀 믿지 않는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잠자리가 할머니였다면 좋겠고, 그 연기를 밀어낸 존재가 역시나 할머니였다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바람이 믿음이 되어버린 순간 나는 믿지 않는 그 세계를 어느샌가 간절히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완벽히 사라져 버린 할머니에게 나는 말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죽음을 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믿을 테고 누군가는 그저 의식의 끊어짐 그리고 not thing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영혼, 환생, 죽음 이후의 세계......

나는 무엇을 믿는가.

어쩌면 그런 것들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에게 소중한 것들이 있고 그것은 내게 신념과 믿음을 준다.

그것은 증명도 필요 없고 의심도 필요치 않다.

그냥 그것 자체로도 충분하다.


20년 전쯤이었을까, 생각해보니 그날도 오늘과 비슷한 계절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 자전거 뒷자리에 누이와 내가 올라타고 기차역으로 떠날 때 배웅하던 할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다.

까만색 머리에 너무나도 젊었던 할머니, 우리 아가 잘 가라고 눈물을 훔치던 할머니.

그래서 가을날이 늘 슬펐던 걸까.                                          

마침내 할머니의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뒤를 보니 그곳에 그 젊었던 할머니가 서 있었다.

나에게 ‘아가 잘 가’라고 할머니 특유의 말투로 소리치셨다.

나는 그때 그 아이처럼 또 아무 말도 못 하고 울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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