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나는 나이 든 나를 만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13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by 박시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저기요. 박윤재 기자님 맞죠?"

얼마 후, 그녀가 서있던 그곳에 낯선 여자가 있었다.

나는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나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누구시죠?"

"저는 아시아 뉴스에 근무하는 민아름 기자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그 순간 번쩍하고 머릿속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아시아 뉴스라면 그녀가 있는 곳 아니었던가.'

"저, 다름이 아니라 김서연 기자 알고 계시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잠시 얘기할 수 있을까요?"

10분 후

"뭐 드릴까요?"

"커피요."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그녀가 누런 서류봉투를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죠? 그녀에 대한 일이라면 더 이상 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열어보세요. 서연이가 꼭 전해주라더군요."

내 말을 끊으며 그녀가 테이블 위에 서류봉투를 내 앞으로 밀었다.

"이게 뭐죠?"

나는 조심스럽게 서류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유럽 왕복항공권, 유럽 철도 패스, 그리고 편지 한 장.

“서연이가 내게 이걸 주면서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쪽에게 꼭 전해주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사라졌어요. 회사도 나오지 않고 집에도 없더군요. 물론 전화도 받지 않고.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거예요, 혹시나 해서.”

“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게 다 뭔지도 모르겠고…….”

“저도 몰라요. 다만 이것만은 아셔야 할 것 같네요. 박 기자님 인터뷰 기사 나가는 거 마지막에 서연이가 막으려고 했었어요. 물론 자신이 썼지만 박 기자님을 속이는 게 마음에 걸렸나 봐요. 하지만 이미 늦은 거였죠. 위에서 내보내기로 했으니까요.”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나를 속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궁금했다.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정말 죽기라도 한 걸까?

나는 그녀의 편지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혹시나 서연이가 어디 있는지 아시면 아니, 짐작 가는 곳이라도 있으면 알려주세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혹시 그 편지에는 무슨 말이 없을까요?”

그녀가 내 손 끝에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나는 그제야 편지를 천천히 폈다.

윤재 씨와 함께한 시간, 정말 좋았고 즐거웠어요. 그래서 더욱 말할 수가 없었어요.

내가 하고 싶었던 거 다했잖아요. 내게는 정말 잊지 못할 순간들이었어요. 삶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었어요. 윤재 씨가 없었다면 아마 하지 못했을 거예요.

이제는 윤재 씨가 하고 싶은 거 할 차례예요.

유럽 배낭여행 가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내가 주는 작은 선물이에요. 꼭 받아주세요.

그리고 내 기사 꼭 써주길 바랄게요.

"무슨 말 있어요?"

"아니요."

"그럼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이거 언제 받았어요?"

내가 물었다.

"그제요. “

나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찾아야만 한다.

나는 곧바로 그녀와 함께 했던 곳부터 가서 그녀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서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와 함께 찾았던 바닷가에도 그녀는 없었다.

'약속 지킬게요.'

그녀가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나는 마지막으로 김포의 건물 옥상으로 갔다.

제일 가까운 곳을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이다.

그곳은 그녀와 함께 위시리스트의 2번을 실행했던 곳이기도 했다.

범인이 범죄현장을 다시 찾아오듯이 막상 그곳을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 옥상 문 앞에 도착했다.

혹시나 그녀가 있을까 봐 떨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이곳에 있길 바랐다.

끼익.

문을 밀어 열었다.

하얀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간신히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없었다.

그녀가 사라진 지 일주일이 흘렀다. 그녀의 직장동료는 행방불명 신고를 해놓고 경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책상 위에 있는 비행기 표를 바라보았다.

'이딴 거로 당신을 용서할 거 같아?'

매일같이 드는 한 가지 의문점, 그녀는 어디로 떠난 걸까?

나는 언제나처럼 걸었다.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이동을 한 것처럼 어느 장소에 서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강화대교 위에 서있었다. 차들이 무섭게 달리는 그곳에 내가 다시 있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만난 남자가 앉아있었던 난간이 보였다.

'그도 몇 번씩 이곳을 찾았어.'

그녀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다시 옥상으로 향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인생은 영화나 드라마와는 다르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에도 그녀는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곳을 찾아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2주가 흘렀다.

그날도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옥상 문 앞에 도착한 나는 평소와 다른 기분(인간에게는 밝혀지지 않은 능력이 있다)을 느꼈던 것 같다.

이전과 다르게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문을 천천히 밀었다.

'오늘도 없을 거야.'

어떤 것에 익숙해지면 그 익숙함을 깨는 것이 무척이나 두렵다. 그래서 익숙함을 더 찾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녀가 없는 것이 더 익숙하다.

문이 열렸다.

기대와 달리 그녀가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옥상 난간 위에 서 있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간다면 10층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거기서 내려와요."

"너무 침착하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나한테 이런 상황은 꽤나 익숙하거든요. 그나저나 유럽행 비행기 티켓 하나 던져주면 모든 게 용서가 될 줄 알았어요?"

나는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씩 웃은 뒤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발아래 펼쳐진 세상을 바라봤다.

잠시 후, 우리는 나란히 옥상 난간 위에 앉아있었다.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네요."

"만나지 못할 거 같은 사람을 우연히 다시 만나기도 하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있는 게 인생이잖아요."

"나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 아니었나요?"

"내게 했던 말 모두 사실이란 거 알아요."

나는 그녀의 질문을 철저히 무시한 채 말했다.

"죽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그녀가 바람을 느끼며 말했다.

바람이 앞에서 불어왔다. 혹여 뒤에서 강한 바람이 분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얼마 전에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요?"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 말을 잘랐다.

"끝까지 들어봐요. 소변을 보는데 눈앞에 어떤 글귀가 있더라고요. 아, 근데 여자는 그런 게 있나요? 남자는 소변기 위에 명언 같은 것들을 붙여있거든요."

"몰라요. 여자한테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아니에요."

"뭐, 어쨌거나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살기 위해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인류의 역사상 어떤 예외도 없었다.

확실히 오는 것을 일부러 맞으러 갈 필요는 없다.

그때까지는 삶을 탐닉하라.

우리는 살기 위해 여기에 왔노라. - 셰익스피어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말해봤어요."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느새 발아래 세상에서는 불빛들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언젠가 다리 위 난간에 매일같이 앉아있다 돌아가기를 반복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내가 말했다.

“그 사람도 죽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맞아요. 그랬어요. 지금의 서연 씨와 같은 마음 일거예요. 그 사람이 왜 뛰어내리지 않았는지 알아요?”

“그거야....... 그 순간, 누군가가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나는 그녀를 쳐다봤다.

“누군가가 보고 싶어서라……. 음, 그러면 서연 씨는 누가 보고 싶어서 못 뛰어내렸는데요?”

“네?”

그녀는 눈을 돌려 먼 곳을 바라봤다.

나는 그녀가 죽도록 미웠고 그녀는 죽으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웃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죽음 앞에서 우린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우울해하지 않았다.

“약속 지킨다는 게 결국 여기서 뛰어내린다는 거였어요?”

“약속은 지켜야죠.”

“참 나. 혹시 유서에 '박윤재 기자와 약속 때문에 죽는다.'라고 적은 건 아니죠?”

“에이, 설마요.”

우리에게 다시 잠시의 침묵이 찾아왔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됐어요?”

그녀가 내게 물었다.

“다리 위에 남자요? 글쎄요. 아마도 보고 싶은 사람을 찾아갔겠죠.”

어느새 날은 조금씩 어두워지는 듯 발아래로 하나둘 불빛이 보였다.

“밤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아침은 아니에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이제 서로에게 남은 앙금은 없는 거죠?”

그녀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에게는 ‘우리에게 남은 애정은 없는 거죠?’라고 들렸다.

참 허무하고 간단하게 나는 그녀를 용서했고 남은 감정마저 정리했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그녀를 용서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또다시 이곳을 올라올까?

그것은 알 수 없다. 나는 여기까지 일 뿐이다. 그녀가 다시 이곳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녀와의 인연은 이것이 끝이 아니란 것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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