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비 오는 거리
비 오는 거리
다음날 나는 그녀에게 문자를 했다. 몸은 괜찮은지 물었지만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 또 문자를 했지만 역시나 응답이 없었다.
그다음 날은 전화를 했다. 역시나 그녀는 받지 않았다.
'비가 오면 연락한다고 했는데…….'
하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급기야 기상청에 전화를 했다.
"여기 비 언제 와요?"
하루에 5번씩 기상청에 문의를 했다.
아직 비 소식이 없다는 안타까운 말만 되풀이했다.
'화창한 봄날 나들이 계획 한번 세워보시는 건 어떨까요? 오늘도 파란 하늘을 보실…….'
나는 이제 기상캐스터의 이름까지 외울 정도였다.
이상했다. 한때는 매일 같이 비가 내린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비가 내리지 않는 게 도통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늘은 매일같이 눈부시게 파랗지만 내 마음은 잔뜩 흐렸다.
벌써 2주일이 넘었다. 더 이상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없었다.
'집을 찾아가 봐야 해. 아냐, 경찰에 신고해야 할지도 몰라.'
나는 매일 밤마다 그녀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벌써 목숨을 끊었을지도 몰라. 자살은 다소 충동적이기도 하니까.'
그녀가 다리 위에서 검은 물 위로 뛰어내리는 상상을 하니 머리가 찢어지게 아팠다.
"아 짜증 나. 오늘 흰 바지 입고 왔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그러게. 오늘도 맑다고 했는데."
사무실의 두 여직원의 속닥거리는 대화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내가 창문으로 달려가려 하자 때마침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우두두 쏟아지는 빗방울이 너무 반가웠다.
"아 싸!"
사람들은 시선은 모두 나를 향해 있었다.
"비, 비가 와서……."
우우웅. 우우웅.
그 순간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비 오는 거릴 걸었어. 너와 걷던 그 길을 눈에 어리는 지난 얘기는 추억일까
그날도 비가 내렸어 나를 떠나가던 날
내리는 비에 너의 마음도 울고 있다면 다시 내게 돌아와줘 기다리는 나에게로
그 언젠가 늦은 듯 뛰어와 미소 짓던 모습으로 사랑한 건 너뿐이야 꿈을 꾼 건 아니었어 너만이 차가운 이 비를 멈출 수 있는 걸……."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그녀의 노래는 어느 순간 멈췄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내가 먼저 침묵을 깼다.
"노래....... 잘 하네요."
"그날도 비가 왔어요. 내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 비가 정말 많이 왔어요, 바로 오늘처럼……."
나는 아무런 말없이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과 함께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더군요. 내가 물었죠, 이유가 뭐냐고."
"이유가 뭐였어요?"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겠다고."
"네? 무슨 그런 말이……."
"나도 몰라요. 그래서 그냥 걸었어요. 우산은 그 사람에게 주고 나는 비 오는 거리를 그냥 걸었죠. 그렇게 한참을 걸었어요."
'그녀도 사랑했던 누군가가 있었겠지. 누구나 그렇잖아. 그런데 나는 왜 그녀가 단 한 번도 사랑해보지 않았을 꺼라 생각했을까?'
"우리, 오늘 함께 걸어볼래요?"
"지금 어디예요?"
나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고 바로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도 나를 향해 오고 있었고 나도 그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우리는 김포에서 다시 만났다. 누군가에게 다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곳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재빨리 우산을 폈다.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버스가 사라지고 건너편에 버스정거장이 보였다.
그곳에 그녀가 서 있었다. 내리는 비에 그녀의 모습이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육교로 달려갔다. 군데군데 웅덩이가 생겨 있어 흙탕물이 사방에서 튀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육교 아래로 내려가자 그녀가 또렷이 보였다. 그녀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내가 있던 버스정류장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쓰고 있던 우산을 정류장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여학생에게 던져주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감길 정도로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홀딱 젖은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7번 해야죠. 우리 걸을 까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하늘이 뚫린 듯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비가 너무 반갑네요."
"왜요?"
"비가 오면 만나자고 했잖아요. 그래서 기다렸어요."
"미안해요."
이전의 그녀와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내게 죄라도 지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냥 모든 게 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우린 지금 이렇게 비를 맞고 있잖아요."
'사실 당신과 8번도 하고 싶어요.'
나는 두 팔을 들고 하늘 향해 입을 벌린 채 앞으로 뛰었다.
그러자 그녀가 뛰어와 나를 붙잡았다.
"윤재 씨!"
그녀의 부름에 내가 뒤돌아보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8번……."
그리고 내게 입을 맞췄다. 그녀와 내 입술은 촉촉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을 탐닉하기도 전에 나는 입술을 뗄 수밖에 없었다.
"미,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나는 입안에 가득한 물을 뿜으며 그녀에게 급하게 사과했다.
그녀가 웃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소리 지르며 웃기 시작했다. 아니,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거리 위에 고인 빗물을 손에 담아 그녀에게 뿌렸다.
"어? 그래요. 좋아. 일루와요, 가만 안 두겠어!"
복수한다며 그녀는 자꾸 내 윗옷을 벗기려고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리가 미쳤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를 재빨리 피해 갔다.
"하지 마! 아, 하지 마! 내 옷!"
우리는 해변에 놀러 온 사람들처럼 잠시 정신 줄을 놓고 정신없이 놀았다. 바닷가에서는 얌전히 누워만 있던 우리는 도심지에서 처음 물을 만난 것처럼 미쳐있었다. 이것은 마치 도심지에 풀린 멧돼지 두 마리와 같았다.
모든 사람이 피해 가고 가까이 오길 두려워했다. 우린 그렇게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둘만의 시간을 이 복잡한 도시에서 만들었다.
"우리가 이곳을 접수한 거 같아요!"
한참을 놀다 지친 내가 말했다.
"역시 체력은 내가 좋다니까."
"그래요. 내가 항복할게요. 인정!"
비도 어느새 그쳤다. 이곳엔 홀딱 젖은 생쥐 두 마리만 남았다.
"어때요, 미쳐보니까?"
"미쳐보니까....... 정말 미칠 거 같아요. 하하."
지금까지 나는 미쳤던 게 아니었던 걸까? 그동안 미처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늘 불행했지만 오늘 미쳐보니 미치는 것이 꼭 불행한 것만은 아니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녀가 내게 키스를 했다. 물론 그녀와의 첫 키스는 절반의 성공뿐이었다.
과연 우리는 함께 할 수 있을까?
"그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사랑이란 게 다 그런 거래요. 만나고 헤어지고의 반복이라나. 우린 지금 헤어지는 그 순간에 와 있는 거라고 뭐 그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고 가버렸죠. 그렇게 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연애는 끝났어요."
'나와 두 번째 연애를 해보지 않을래요?'
나는 내 안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윤재 씨....... 우리 다 해냈어요. 1번부터 8번까지 물론 8번은 좀 그랬지만……."
1. 클럽 가기
2. 높은 곳에 올라가서 지나가는 개자식에게 물 쏟아붓기
3. 바닷가에 누워 밤하늘 올려다보기.
4. 낮부터 초저녁까지 가만히 누워서 하늘 올려다보기.
5. 좋은 일 해보기
6. 아무도 없는 백사장에서 미친 듯이 뛰어보기
7. 비 오는 거리에서 미쳐보기
8. 우리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있는 곳에서 키스하기
어찌 보면 그리 대단한 일들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린 정말 감격스러웠다. 처음 시작은 서로의 대한 불신 뿐이었지만 우리가 함께한 것들은 더 이상 그녀만의 위시리스트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나를 뛰게 했고 보이지 않던 세상을 보게 했으며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도 알게 해주었다.
나는 그녀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면 만날수록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하나둘 사라질수록 불안감은 떨쳐지지 않았다.
“이쪽으로 가세요.”
나는 그녀를 인도 안쪽으로 걷게 했다. 언뜻 보면 남자의 매너라고 볼 수 도 있지만 사실 나는 너무 불안했다. 왠지 달리던 차가 빗길에 미끄러지며 인도를 덮쳐 그녀를 죽게 만들까 봐. 머리가 깨지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릴 것 같았다.
우리는 옷과 몸을 말려야 했기에 가까운 모텔로 들어갔다(너무도 자연스럽게). 옷에서 빗물이 주르륵 떨어질 정도로 온몸은 흠뻑 젖어있었다.
“대실이요.”
그녀가 모텔에 들어서 자연스럽게 대실을 요청했다.
‘대실’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느낌은 다소 성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나는 어떤 것에 집중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졌다. 드라이기를 이용해 그녀의 옷을 말렸다.
“조금만 더 말리고 가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옷을 걸어두고 그녀의 옆으로 가 앉았다. 우리는 방안에 준비되어 있던 가운만을 걸친 채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옷을 향해 나는 다시 드라이기를 켰다. 조용한 방안에는 드라이기의 소음뿐이었다.
그녀가 나의 손을 잡고 드라이기를 뺏어 꺼 버렸다.
“시끄러워요.”
또다시 이어지는 침묵.
깊게 파인 가운 사이로 그녀의 가슴골이 보였다. 나는 재빨리 눈을 돌린 채
다른 상상을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나의 눈은 다시 그녀를 향하고 있었고 더 이상 멈출 수 없었다.
눈을 감고 그녀의 입술을 미친 듯이 탐닉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게 이런 느낌이었을까?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지금 순간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운을 벗기려는 순간, 그녀가 갑작스럽게 옷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미안해요. 안 되겠어요.”
나는 길가에 빨가벗겨 내 던져진 사람과 같았다. 그녀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고 나는 이 순간에 최후의 주인공이 되었을 그 어떤 것에 존재 자체를 철저히 모른척해야만 했다.
보이지만 잡을 수 없는 물처럼 허무했다.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거야. 그녀가 충분히 부담스러울 수 있었어.’
그렇지만 그때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녀가 나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죽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래서 나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몇 분 후,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무슨 말이에요? 뭐가 미안하다는 거예요?”
아직 마르지 않은 옷을 입고 그녀가 부들부들 떨며 화장실 앞에 서있었다.
“괜찮아요.”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말을 천천히 그리고 톤을 낮게 했다.
“이쪽으로 다시 올래요?”
그녀는 천천히 다시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나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다고 했죠. 한 번 들어볼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동안 나 자신도 생각하기 싫어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늘 혼자였던 학창 시절, 그리고 대학시절부터 좋아했던 그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어떻게 이 일을 시작했으며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의 숨은 이야기까지 내 안에 모든 것을 송두리째 꺼내놓았다.
누군가에게 나만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하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수년 동안 어깨 위에 올려져 있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후련했다.
어느새 그녀는 침대 위에 편하게 누워 내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나도 자연스레 그녀 옆에 누워 나의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그 사람....... 많이 사랑했어요?”
갑작스레 내가 물었다.
“누구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온 주먹을 맞은 듯 나의 질문에 그녀가 당황해했다.
“모르는 척하지 말아요.”
“괜히 그런 말을 했네요. 창피하게…….”
“괜찮아요.”
그녀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차마 지금도 그를 사랑하냐고 물을 수 없었다.
다음날
창문으로 쏟아진 햇빛에 나는 가는 눈을 떴다. 새벽녘까지 우리 대화는 이어졌고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침대 위에는 나만 홀로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날 이후 그녀의 연락은 없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때가 되면 그녀가 나를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전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나는 불안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혹시나 그녀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길 바라며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나는 아파트 입구에 앉아 무작정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경비실로 찾아가 물었다.
“여기 김서연이라는 사람 살고 있나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한 가지 정보뿐이었다. 몇 층 몇 호에 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 건 우리가 말해 줄 수 없어요.”
나는 그냥 확인만 해달라고 했지만 경비원은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저는 친구예요. 그리고 지금 그 친구가 자살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어서 알려주세요.”
“아이고, 거참 답답하시네. 우리가 이런 일 한 두 번 겪는 줄 알아요. 웬만하면 잊고 다른 여자 찾아봐요. 세상에 여자가 어디 하나뿐인가.”
“그,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쫓겨나듯 경비실에서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무작정 그녀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나도 모르지만 그냥 걸었다.
그리고 아침이 왔고 나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아침 11시,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에....... 난데.”
“아, 편집장님 오늘 외부에서 취재 좀 하고 있습니다.”
“에,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인터넷에 자네 이름 검색해봐.”
“왜요?”
“그러면 오늘자 기사가 있을 거야.”
“기사요?”
“에....... 누가 자네를 인터뷰 한 내용을 실었는데, 이거 자네가 오케이 한 거야? 그게 아니라면 고소해야 하니까.”
“뭐라고요? 무슨 소리예요 그게?”
“누가 자네 이용해서 기사를 썼다고. 웬만하면 사무실에 나와서 다시 이야기-”
나는 바로 전화를 끊고 노트북을 열어 내 이름을 검색창에 넣었다. 그리고 검색을 눌렀다.
많은 기사가 줄줄이 검색되어 나왔다. 과거 일들에 대한 오래전 기사들도 보였다.
하지만 오늘자 기사가 눈에 띄었다.
‘[단독] 기자가 만난 사람, ‘죽음의 끝에서’ 박윤재 기자를 만나다.’
화제를 몰고 다니는 박윤재 기자, 그는 누구인가?
“누구야? 대체 누구야!”
나는 흥분해서 스크롤을 맨 밑으로 내렸다.
‘아시아 뉴스 , 김서연 기자’
“김서연…….”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무 생각도 아무 느낌도 없이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제정신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웃음이 났다. 웃지 않고는 도저히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나는 하나 둘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왜 우울해 보이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녀가 내게 미안하다고 했던 것은 모두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옷차림에서 내가 이상하게 느꼈던 것은 당연했다. 나는 기자였고 여성 기자들의 옷차림이 눈에 익었기에 당연히 그녀가 입었던 옷차림이 내게 익숙함을 준 것이다. 또한 내가 혹시 기자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표정은 몹시 당황했었다.
그녀는 나에게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나와 함께 했던 시간은 모두 인터뷰를 위한 쇼였단 말인가.
또 그녀의 위시리스트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나는 야구선수에게 방망이로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듯 정신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조심하라고,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일삼을 때도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는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내게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를 만난 후, 나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언젠간 아파야 할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한동안 한 곳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던 갖가지 물건들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나는 손에 잡히는 물건들을 모조리 집어던졌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또 전화벨이 울렸다.
“박기자, 오늘 사무실에 꼭 나와야 해!”
“알겠어요!”
나는 신경질 적으로 전화를 끊고 바로 강화로 향했다.
이 번만큼은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하지만 내 몸과 정신은 완전히 분리되어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어느샌가 나는 강화에 와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의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져 있었다.
아니, 몇 시간 동안 나는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몸은 익숙함을 기억한다. 이곳까지 내 몸이 스스로 찾아온 것이다.
아주 멀리서 바라본 건물 앞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는 나의 눈이 익숙함을 기억했다. 마치 비밀정보부의 최첨단 컴퓨터가 사람의 형상만 가지고 누군지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성별도 구분되지 않는 먼 거리였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녀라는 것을.
약간의 망설임도 있었지만 나는 평소보다 더 빨리 걸었다. 우리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점점 그녀의 얼굴이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앞을 지나쳤다.
그러자 그녀가 초조함과 불안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 나의 옷깃을 검지와 엄지로 간신히 붙잡았다.
“저, 잠시만....... 잠시만 얘기해요.”
나는 나의 옷 끝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무섭게 노려봤다.
그러자 그녀가 손을 슬며시 뗐다.
“나한테 더 원하는 게 있나요?”
“이 상황이 이해 안 되는 거 알아요.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미안해요. 이 말하려고 왔어요. 정말 미안해요…….”
“내가, 내가…….”
나는 복받쳐 오는 배신감과 억울함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침착해야 했다. 나는 항상 이랬다. 억울하거나 화가 나며 하고 싶은 말을 잘 못하는 그런 성격이었다.
“내가 화가 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 나를 너무 철저히 속이고 이용했다는 거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끝까지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말해야지, 말해야지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라도 말했어야지!”
“말하면....... 말하면 더 이상 당신과 함께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 그래서 지금 터트린 건가?”
“변명하지 않을게요. 제가 쓴 기사 맞아요. 하지만 제 진심만은 꼭 알아주길 바라요.”
“진심? 진심이라. 나 원 참.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놓고 진심을 알아 달라? 서연 씨는 참 말 쉽게 하는군요.”
“미안해요…….”
그녀의 얼굴은 울긋불긋 군데군데가 벌겋게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나는 당신을 믿었어. 그래서 내 모든 걸 말해줬는데 당신은 그것을 이용해서 기사를 쓴 거야. 뭐, 같은 기자로써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야.
남들과 다른 기사를 쓰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훌륭해(박수를 치며). 당신 정말 대단한 기자야.”
나의 비꼼에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를 적당히 가지고 놀았어야지!”
나의 강력한 스트레이트 한방에 그녀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왜, 왜! 도대체 왜 말을 안 한 거냐고!”
“하면! 했으면....... 나를 계속 만났을 수 있었을까요? 처음부터 말했다면 나를 만나주지도 않았을 거잖아요.”
“나를 계속 만나고 싶어서 그랬다? 하하하.”
나는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는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모든 것은 변명이다. 그 어떤 말로도 이것을 정당화할 수 없으니까.
“당신은 당신이 원했던 것을 모두 했어요. 기사가 나갔으니까. 만약 기사를 쓰지 않고 내게 이런 사실을 먼저 말했다면, 그 결백함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어요. 내게 용서를 바라는 것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것 밖에 안돼요.”
“미안해요…….”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만 가보세요. 앞으로 볼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나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가운 말을 남기고 건물로 들어가려 했다.
“기사 쓰세요!”
그녀가 소리쳤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약속....... 지킬게요.”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녀의 모든 게 짜증 났다. 얼굴조차 이제 보기 싫어졌다.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계단 옆 큰 창문을 통해 슬며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천천히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사라져 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네가 이러니까 매번 이렇게 당하는 거야!’
나는 이제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
편집장은 그 내용이 모두 사실 이냐며 귀찮게 계속 물었다.
그 사람들이 죽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우리에게 속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박기자, 그 여자와 인터뷰한 적이 없다고 말해. 아냐, 그 신문사를 고소해야겠어.”
“그만 하세요!”
사무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항상 차갑게 노려만 보던 김숙희 씨는 이전과는 다르게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제발 그만 하세요. 그 사람들이 죽지 않은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죽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가는 게 그리도 잘못된 건가요?”
“에....... 에....... 그, 그렇지. 나는 그런 뜻이 아, 아니었어.”
편집장은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거렸다.
항상 말이 없고 소극적으로 대답만 하던 사람의 갑작스러운 폭발로 인해 사무실은 전체적인 패닉 상태에 빠져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나왔다.
몸이 기억하는 대로 걸었다. 길을 걷다 보니 가로등이 깜박거렸다.
나는 가로등 밑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깜박 거리던 가로등은 이제 완전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가로등 불빛을 막아 보았다.
“이렇게 손으로 가로등 불빛을 막을 수 있어요.”
“그걸 막아서 뭐하게요?”
내가 물었다.
“이렇게 막고 있으면 몸이 따뜻해져요.”
“태양도 아니고 몸이 왜 따뜻해져요?”
“어릴 때부터 이렇게 가로등 불빛을 막고 있었어요. 이렇게 하면 빛이 손 주변으로 퍼지잖아요. 그러면 모든 게 따뜻하게 느껴져요.”
그녀와의 기억들.
나는 또다시 정처 없이 걸었다. 내 인생은 마치 끝이 없는 안개 길을 계속 걷고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괴로워했다.
낯선 곳에 그녀와 함께 갔던 커피숍이 보였다.
분명 같은 커피숍이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간판도 있었다.
나는 무엇에 이끌린 것처럼 다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나른한 종업원도 없었고 나오지 않던 음악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When the rain is blowing in your face
and the whole world is on your case
I could offer you a warm embrace
to make you feel my love…….
하지만 손님은 여전히 없었다.
나는 우리가 앉았던 그 자리로 갔다. 하얀 벽에는 이런저런 글들이 적혀 있었다.
‘그때는 왜 보지 못했던 걸까?’
영원하자는 사랑의 서약들, 그리고 짝사랑 고백도 보였다. 그중 내 눈길을 잡아 끈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린 아마도 알지 못했을 거예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죠. 내 마음을 조금만 빨리 알았더라면 당신을 붙잡았을 거예요. 하지만 사랑이란 게 때론 그런 거잖아요. 가끔 누군가 한 말이 뒤늦게 들려오는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나 역시 그랬어요. 당신을 만난 후 당신이 더 그리워지기 시작했거든요. 당신도 그럴 거라 믿어요.
당신을 잘 모르지만 나는 지금 당신이 몹시도 그립습니다. 당신과 손잡고 늙어가고 싶어요. 하지만 나는 지금 떠나야 해요. 운명이란 것이 있다면 우린, 다시 만날 수 있겠죠?’
우리는 항상 마지막 인연을 찾아 헤맨다.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또다시 마지막 사랑을 찾아 방황한다. 어떤 이는 아주 멀리 있는 사랑을 평생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못 보고 헤매기도 한다.
지금 이 글의 두 주인공은 어디쯤에서 서로를 찾아 헤매고 있을까? 얽히고설킨 인연의 끈들 속에서 제대로 서로의 끈을 잡아당길 수 있을까?
이 사람의 마지막 인연의 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그곳에서 마음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헤어짐도 결국 익숙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그녀는 내게 사과를 했고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괜찮았다. 다시 일하러 나가고 저녁이면 퇴근해 집으로 온다.
밥도 거르지 않고 잘 먹는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신당했다고 울고불고 괴로워하지 않았고 목숨을 스스로 끊으려 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삶이다.
하지만 나는 마치 기계처럼 행동했다. 생각하지 않았고 느끼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는 다시 길모퉁이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 안에서는 아무런 감정의 파도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쁨, 슬픔, 분노 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