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바다를 만나다
바다를 만나다
"이런 바다를 본 적 있어요?"
그녀의 머리카락은 바닷바람에 살아 있는 듯 춤을 췄다.
"있어요. 상상 속에서……."
나는 바다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파도가 나를 집어삼킬 듯 달려오고 있었다.
바람이 일으키는 물결에 파도는 이리저리 때리고 싸웠다. 그들이 싸우는 소리가 점점 심해졌다.
내 머리스타일은 항상 이마를 덮고 찢어진 눈을 반쯤 가리고 있어 지저분하게 보이기도 하고 밤에 보면 무서운 이미지로 돌변하기도 한다.
바닷바람에 내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나는 마치 수십 년간 몸에 걸치고 있던 것을 벗어던진 기분이 들었다. 시원했고 후련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 치부를 모조리 드러낸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다.
“자, 이제 뛰어볼까요?”
그녀는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로 곧장 달려갔다.
그녀를 덮칠 듯 몰아치는 파도에 나는 잠시 움찔했다. 잔뜩 입을 벌린 파도가 그녀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조심해요!”
"뭘 망설여요!”
그녀는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나도 달려갔다.
“앗! 차가워!”
“왜 그래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내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말았다.
그녀가 한 말이 뒤늦게 나에게 전달되었다. 가끔씩 그런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고 ‘뭐라고?’라고 묻지만 다시 듣지 않고도 곧장 생각이 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도 그랬다. 놀란 나머지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그 순간 그녀가 했던 말이 축축한 바람에 뒤섞여 뒤늦게 들려왔다.
그녀는 나를 잠시 동안 바라봤다. 그 눈빛은 순수하고 혼란스러운 느낌이었다. 나는 슬며시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녀는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슬며시 웃었다.
“우리 같이 뛰어 봐요.”
“저도요?”
“같이 왔는데 당연히 같이 뛰어야죠.”
우리는 백사장 끝에서 끝까지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친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끌려가듯 매우 힘겹게 달렸지만 즐거웠다. 그녀의 손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마치 구름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날씨는 너무나 맑아 파란 하늘이 가짜처럼 보였다. 마치 유명 화가가 아름다운 상상에 사로잡혀 그려놓은 것처럼 완벽했다. 우리는 그림엽서 안에 있었다. 하늘과 바다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달리고 싶다던 하얀 백사장, 나는 그 안에 있는 남자 주인공, 그녀는 여자 주인공.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카락 날리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그녀의 미소를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구름은 너무나 느리게 움직였고 바람도 천천히 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파도는 같은 속도로 밀려왔다 다시 끌려갔다. 모든 것이 느려진 이 시간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바다의 시간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일까? 이유가 뭐지?
언젠가 그녀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내가 슬플 땐 바다도 슬퍼해.’
‘내가 기쁘고 행복할 땐 바다도 즐거워해.’
‘그런데 말이야, 알고 보니 바다는 언제나 똑같았어. 단지 나의 마음이 이리저리 변했던 거지.’
“너, 너무 힘들어요.”
나는 백사장 끝까지 달린 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족히 몇 백 미터는 달린 것 같았다.
터져버릴 것 같던 심장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그대로 누워버렸다.
그녀도 나를 따라 옆에 누웠다.
“심장이 터질 것 같으니까 어때요?”
“어떻긴요. 죽을 거 같죠.”
“살면서 이렇게 심장이 터지도록 뛰어 본 적 있어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없어요. 그래서 하고 싶었던 거예요. 내 심장은 언제나 잔잔한 바다였어요. 엄마가 죽었을 때도 그랬고, 죽으려고 옥상 위에 올라섰을 때도 그랬어요. 마치 기계처럼 늘 같은 속도로 일정하게 뛰었죠.”
“오늘은 어땠어요? 오늘도 기계처럼 똑같이 뛰었나요?”
내가 물었다.
“아니요. 오늘은 달랐어요. 폭발할 것처럼 미친 듯 뛰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격앙되어있었다.
그녀는 가슴에다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내 심장도 뛰고 있네요.”
나도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느껴졌다, 심장이 살아 뛰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심장이 뛰고 있네요.”
신비로웠다. 손으로 느껴지는 것은 단지 심장의 운동뿐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나 자신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심장은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나타났던 괴물이었을 뿐이지 삶의 증거가 아니었다.
그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살아있다는 증거죠.”
“이게 멈추면 죽는 거겠죠?”
“그렇다고 봐야죠.”
“그럼, 지금까지 나는 죽어있던 걸까요.”
나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나 죽으려고 했었거든요.”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내 입에서 감추고 싶은 비밀이 터져 나왔다.
“왜요?”
그녀가 담담히 물었다.
“어떤 여자를 사랑했었어요. 몹시도…….”
“아, 차였구나.”
나는 슬픈 감정이 올라오다가 그녀의 말에 다시 내려갔다.
“음........ 차, 차였죠.”
“그래서 이런 기사를 쓰기 시작한 거구나.”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딱히 별다른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굳이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나 알고 있었어요. 그 삼각스캔들의 주인공 이란 거. 그때는 떠들썩했었으니까.”
“그런가요. 지금은 다 잊힌 이야기 아닌가? 기억력이 좋은가 봐요. 아니면 저에게 관심이 많으시던가.”
나는 정말 나답지 않은 말을 했다.
“하하. 네, 윤재 씨에게 관심이 많아요. 그것도 아주 많이.”
내가 던진 농담에 나는 끝까지 책임을 지지 못하고 멍하니 파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예뻤나요?”
“아름다웠어요.”
“그거야 모르죠. 미의 기준은 다르니까.”
“대학 땐 모든 남학생들이 좋아했을 정도로 예뻤고요…….”
나는 그녀가 아직 나의 연인인 것 마냥 그녀의 칭찬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아무런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한마디를 꺼냈다.
“그럼 다시 가서 만나지 그래요?”
그녀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런 말이 아닌데요.”
‘그녀가 질투하는 걸까? 왜?’
만약 내가 몰랐다면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것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란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질투를 가지고 태어난다.
자신을 뺀 모든 여성에게 질투를 느낄 수 있다. 외모에서부터 아주 작고 사소한 것까지 모든 것에 걸쳐있다.
“그 여자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죽으려고 까지 했던 거예요?”
“그녀가 얼마나 대단해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사랑했던 누군가가 떠나갔기 때문이었어요.”
나의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나와 같은 이유로 여기까지 온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 그까짓 거 별거 아니잖아요. 사람들을 봐요. 만났다 헤어지고 다 그렇게 살잖아요. 또다시 사랑하면 되는 거니까. 떠나간 누군가를 다른 사람으로 채워 봐요.”
“마치 컴퓨터에 입력된 로봇들이 사는 세상 같아요. 어쩜 그리도 쉽게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하루아침에 옮겨가고 사랑하는지……. 생각해봐요. 눈을 뜨고 나면 다른 사람이 내 앞에 있는 거예요. 어제까지는 또 다른 사람이 내 눈 앞에 있었는데........ 나보고 그렇게 하라고요? 매일매일 옷을 바꿔 입듯 그렇게 사람을 바꾸라고요? 적어도 난 그렇게 못하겠어요. 누군가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로 채우는 건 내게 여름에 패딩을 입고 겨울에 반팔을 입으라는 것처럼 맞지 않는 일이에요.”
“그러면 언제까지 떠나간 그녀와의 과거만 곱씹으면 살려고요? 그건 자신을 파괴하는 것밖에 안되잖아요. 영원할 줄 알았어요?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디 있나요.”
"영원할 줄 알았죠.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적어도 나는 그랬어요. 그래서 힘들었고 그냥 모든 걸 멈춰버리고 싶었죠. 그렇게 하면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에서 영원할 줄 알았거든요."
나의 말을 가만히 듣던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때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새 불게 타오른 노을이 우리 뒤에서 지고 있었다. 노을이 만들어내는 색으로 세상은 옷을 갈아입었다.
"여기서 밤하늘 같이 봐요. "
사진이 가장 잘 받는 조명은 노을빛이다. 노을빛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그녀의 눈에 비친 나도, 내 눈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도 그렇다.
노을빛은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그건 마치 따뜻한 지중해가 바라다 보이는 언덕 위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바람은 헤어스타일리스트가 되어 그녀의 머리스타일을 만들어주고 노을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어 그녀의 얼굴에 내추럴 메이크업을 해주었다.
'이렇게 아름다웠나…….'
그녀가 바다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로맨틱 영화 속 한 장면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그런 순간이었다.
황홀함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이건 단지 노을과 바다 때문 일거야.'
하지만 나는 당장이라도 그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멈춰있었다.
그녀의 입술만 보였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우리는 가까워졌고 그녀는 여전히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내 눈앞에 있었고 나는 멈췄다. 그러자 멈춰있던 그녀가 천천히 다가와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여러 가지 가설들이 있지만 키스는 정확히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남자와 여자는 강한 성적 끌림에 의해 키스를 하게 된다. 그 이유로는 아마도 코와 입에서 성적 유도물질이 넘치기 때문일 것이다. 입술과 혀는 우리 몸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 중 하나이다. 키스는 인간의 나타남과 동시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막 시작된 권투경기처럼 그녀의 입술이 초반 탐색이라도 하듯 조심스레 내 입술에 닿았고 그 순간 두 선수의 탐색은 끝이 나고 난타전이 시작되었다.
처음 입술이 닿을 때 부드러운 감촉에 온몸이 찌릿찌릿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르핀을 한 대 맞은 것처럼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윤재 씨 정신 차려요."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눈빛은 좀 전과 다른 느낌이었다. 오래전 돈을 빌려가 갚지 않은 친구를 길 가다 마주친 것 같은 눈빛이랄까.
나는 턱은 한껏 치켜들고 있었고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상태였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그냥 안면 운동…….”
나는 얼굴 근육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어떻게든 증명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나를 째려보았지만 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앉아있었다. 노을빛이 바다로 비추는 장관을 넋 놓고 바라만 보았다.
“근데 직업이 뭐였다고 했죠?”
내가 그녀의 직업을 물었던가? 가만 보면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글쎄요.”
“나에 대해 전부 알아야 한다면서요? 근데 몰라요?”
나도 나에게 묻고 싶었다. 왜 아무것도 모르냐고.
일을 이런 식으로 한 적은 없었다.
“예전에는 그냥 평범한 회사 다녔고 지금은 그냥 있어요.”
“아, 네.”
“혹시....... 아, 아니에요.”
그녀는 말을 시작하려다 멈췄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내키지 않는 것 같아 굳이 묻지 않았다.
“하고 싶었던 일 있었어요?”
“하고 싶었던 거라……. 음,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 뭐, 그런 거요. 윤재 씨는요?”
“글쎄요…….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어요. 하고 싶었던 게 없었던 거 같아요. 단지 성공하고 싶었을 뿐이죠, 남들보다 더. 하지만 지금은 그냥 이렇게 된 거죠.”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이 어때서요.”
“완전히 끝났죠.”
“완전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도 몰라요?”
나는 웃었다. 그녀의 마음만이라도 고맙게 받겠다는 뜻이었다.
파도소리는 우리를 덮칠 듯 요란했지만 우린 안전했다.
노을이 점점 사라지며 하늘은 파란빛과 붉은빛으로 나뉘었다. 잠시 후, 공기가 없는 달이 뜨고 그 결과로 어둠이 밀려왔다. 파랗던 하늘은 온 데 간데 사라지고 시꺼먼 하늘로 변했다.
그녀는 다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나도 그녀 옆에 누웠다.
시간이 지나자 컴컴한 하늘에 별들이 하나 둘 생겨나 조금씩 밝아졌다.
그녀가 보고 싶다던 하늘이 이런 것이었을까?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될까요?”
그녀가 물었다.
“글쎄요.”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사람이 죽으면 자기 자신의 고향을 찾아 수많은 별들로 돌아간다고 말했어요. 우리 엄마도 저곳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러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녀가 자신의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죽음으로 나타났다. 죽으면 만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죽으면 어디로 갈지 모르지. 당신 말대로 다른 별로 가게 될지 혹은 그저 땅속에서 영혼까지 모조리 썩어버릴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당신이 사라진다면 내가 당신을 무척이나 그리워할 거 같다는 거야.’
나는 그녀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더 이상 모른 척, 아닌 척할 수 없었다.
영원하지 않다는 그녀의 말이 옳았다. 나는 이제 새로운 사람이 보인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녀를 향한 마음이 이제 사라져 간다. 믿을 수 없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보이저 1호라고 들어봤어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노을빛 때문에 그녀에게 반한 것이 아니었다. 어두운 밤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은 도자기로 빚은 듯 아름다웠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고 싶었다.
“들어는 봤죠. 근데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1977년 9월에 태양계 행성들을 탐사할 목적으로 우주로 발사되었어요. 이상하게도 원래 예정보다 15년이나 더 지난 지금까지도 어디론 가로 향해가고 있죠. 총알보다 18배나 빠른 속도로 태양계 가장자리인 ‘헬리오스 히스(Heliosheath)'에 도달했다고 하네요. 그거 알아요? 보이저 1호에는 골든 레코드가 실려 있어요. 금으로 도금한 12인치 지름의 축음기용 동판 레코드에 115장의 사진영상과 바람, 천둥, 새, 고래 , 아기 울음소리, 심장박동 소리, 인간의 뇌파 등이 담겨있어요. 그리고 여러 나라의 음악도 있고 쉰다섯 가지 언어의 인사말도 있는데 ‘안녕하세요?’ 도 물론 있고요. 태양계를 완전히 벗어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신비롭지 않아요? 태양계를 벗어난다는 것이.”
“우와, 내가 놀라는 건 보이저 1호 때문이 아니라 윤재 씨가 이런 정보를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인 거 알아요?”
“태양계밖에 펼쳐진 세상은 어떨까 항상 생각했었거든요. 저곳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를 데려가길 바랐어요.”
나는 하늘 위로 펼쳐진 우주를 바라보면 말했다.
“지구밖에도 못 나가봤으면서 무슨 태양계 밖이에요.”
그녀의 말에 우주를 향한 나의 감성은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우리가 지구 밖으로 나가서 태양계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수천 번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거든요.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요.”
“나도 알거든요. 근데 지금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뭐,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내가 좌절하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그녀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삐졌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갈 수 없잖아요.”
“안 가요, 안가. 됐어요?”
“음....... 근데 갈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요. 빛보다 빠르게 달리면 되잖아요.”
“빛보다 빨리 갈 수는 없어요.”
내가 단호히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세상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우주로 가고 싶다고 했죠? 자, 그럼 눈을 감아 봐요.”
“왜요?”
“아이, 감아 봐요.”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내게 부드럽게 말하는 통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가 내 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상상해봐요. 이제 지구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자, 이제 지구에서 우린 멀어지고 있어요. 정말 아름다운 푸른 행성이죠. 따뜻한 바다도 있고, 부드러운 바람도 있어요. 겨울이면 새하얀 눈도 오고, 비도 와요. 하지만 잠시 잊고 우주로 나가보자고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곳을 지나고 또 지나서 우리는 달리고 있어요. 하지만 전혀 속도감을 느낄 수는 없어요.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 고요하죠. 하지만 우리는 빛보다 빠르게 달릴 거예요. 자, 이제 우리 지구의 위성인 달이 있어요. 지구에서 달까지 비행기로 간다면 16일 정도가 걸릴 텐데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가까운 거리죠. 달이 지구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 알죠? 아, 저 멀리 밝게 빛나는 행성이 보이네요. 금성이에요. 근데 겉모습과 다르게 그 안은 지옥 같아서 살기 너무 힘들 것 같네요. 수성도 있어요. 어! 태양이에요, 태양! 정말 엄청나지 않아요? 저, 저 홍염을 좀 봐요! 태양이 죽으면 지구도 끝나겠죠? 무섭지만 감사함을 안고 돌아갑시다.”
그녀는 이야기꾼이 되어 쉴 새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화성이에요. 생명체가 살고 있을까요? 한번 살펴보자고요. 바람이 불어요. 공기가 있다는 거겠죠. 아, 하지만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아요. 콜록콜록. 또 너무 추워요. 그만 이동하죠.”
갑자기 내가 끼어들었다.
“잠깐! 그래도 올림푸스 몬스 화산은 보고 가야죠. 우린 모두 화성인일지도 몰라요. 더 이상 살 수 없는 화성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지구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이제 그만 돌아가요.”
순식간에 우리는 이동했다.
“저기 저 줄무늬 큰 놈 보여요?”
“목성이군요.”
내가 맞장구를 쳤다.
“저 소용돌이 보여요? 엄청나게 크네요.”
“대적점이군요! 300년 동안 계속 휘몰아치는 폭풍우예요.”
“무서워요. 빨리 이동하자고요.”
“얼음 위성 유로파....... 토성이다! 고리가 정말 아름답네요. 그런데 먼지, 얼음 알갱이가 너무 많아요!”
“저기 저거! 저게 뭔지 알아요?”
“저건 바로 타이탄이에요. 지구와 너무나도 비슷한.”
“그런데 너무 추워요.”
“괜찮아요. 태양은 계속 뜨거워지니까 언젠간 이곳도 지구의 환경과 비슷해질 거예요. 그땐 지구에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이곳으로 이주해 올 수 있을 거구.”
“눈부시게 파란 저 행성을 봐요. 우린 이제 태양계에 끝에 와 있어요.”
“정말, 그러네요. 태양계의 끝이네요.”
나는 태양계 끝에 서 있었다.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지구가 반짝였다.
“내가 말했죠, 빛보다 빠른 게 있다고.”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해요.”
“네. 그래야겠죠…….”
“돌아가 준비되었어요?”
“네.”
“그럼 이제 눈을 떠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떴다. 그 순간, 눈을 뜨는 바로 그 순간 태양계 끝에 있던 나는 비디오의 되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믿을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지구로 쏜살같이 빨려오고 있었다.
“휴, 이제 믿을게요.”
다시 수많은 행성들과 위성, 소행성, 먼지 구름 지대를 거쳐 지구 그리고 한국의 이곳 이 바닷가 그녀 옆자리로 돌아온 내가 말했다.
우리는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면 우주 이야기에 빠졌다.
지구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태양이 적색거성이 되면 지구는 인간이 살기에는 너무 뜨거워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 그녀의 말처럼 영원한 것은 없다. 지구가 사라지면 우리는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떠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유로파가 될 수도 있고 타이탄이 될 수 도 있다.
그때가 되면 그녀와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죽으면 정말 어디론 가로 떠나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그녀와 나의 우주 이야기는 이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 이제 춥다. 그만 가요.”
“네? 벌써요?”
“할 거 다 했잖아요. 추워요, 추워.”
그녀는 옷깃을 가다듬고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 위를 총총총 뛰어갔다.
해변에서 나와 얼마 가지 않아 여러 식당들이 보였다. 우리는 그중 한 곳에 들어갔다.
뜨거운 국물이 우리를 녹였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잘 곳....... 찾아볼래요?"
"안 자고 갈 건데요."
"아, 네……. 그럼 어떡해요?"
"집에 가야죠. 버스 예약해 두었어요."
"아, 네……."
나는 아쉬운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오늘 나랑 같이 있고 싶어요?"
"아, 아니요."
"에이, 거짓말."
"아니라니까요!"
나는 재빨리 먼저 걷기 시작했다.
"무성욕자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남자 맞네!"
'저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는 귀를 막고 경보 선수처럼 앞만 보고 걸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에 앉자 피곤함이 밀려왔다.
"피곤해요?"
큰 하품을 하는 내게 그녀가 물었다.
"괜찮아요."
"남자가 그렇게 약해서 여자를 만족시킬 수 있겠어요."
그녀가 나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왜 이렇게 놀라고 그래요."
그녀는 아랑곳 안 하고 내 어깨를 계속 주물렀다. 마치 전문 마사지사의 손길처럼 안정된 안마에 나는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는 그녀의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었다.
나는 놀라서 재빨리 일어났다.
"미안해요. 아,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괜찮아요."
그녀는 포근하게 웃었다.
우리는 밤 버스를 타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버스 안에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엔진 소리와 침묵뿐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도 좋았고 멀리 불빛들이 강 위로 하나 둘 떠내려가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았다. 물론 오늘 밤을 그녀와 함께 했다면 더 좋았을 수 도 있었겠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만족해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은은한 향기가 날 것 같았지만 진한 바다 냄새가 났다. 그리고 모래도 잔뜩 묻어 나왔다.
나는 웃었다. 그녀가 너무 귀여웠다.
우주의 별들처럼 작은 불빛들은 차창 밖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게 될까?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나의 마음은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이 버스가 이대로 영원히 달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바람 들은 시간을 더 빨리 돌리는 법이다. 우리는 이미 서울에 다다르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깬 그녀가 비틀거리며 나의 팔을 붙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졸려."
눈을 거의 감은 채 어린아이처럼 그녀가 말했다.
"데려다 줄게요."
내가 말했다.
"싫어요. 나 혼자 갈래요. 데려다주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가려고 하는 거 다 알거든요."
"무, 무슨 말이에요. 이상한 사람으로 몰지 말아요."
"농담이에요, 농담. 정색하지 말라고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 윤재 씨도 피곤할 텐데 그만 들어가요. 이제 얼마 안 남은 거 알죠? 그때까지 빨리 기사 써요. 비 오는 날 연락할게요."
"비가 언제 올 줄 알아요?"
"언젠가……."
"그러지 말고 이번 주 주말에 만나요."
"안녕!"
그녀는 내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택시를 타고 순식간에 사려져 버렸다.
당장 헤어지는 것도 아쉬운데 비 오는 날까지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