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나의 삶은 또다시 계속 이어졌다. 쓰러질듯 위태롭게 이어져 가는 나의 삶.
나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죽음의 끝에서’ 를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실, 그녀의 이야기를 송두리째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나는 내가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편집장은 전과 마찬가지로 엄지를 추켜세우며 나를 띄워 주었지만 나는 싫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직후부터 써왔던 이야기는 3편으로 나뉘어 실렸다. 나는 잡지책을 찢어버릴 정도로 내가 쓴 글들이 너무 싫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사람의 마음은 계속 변하니까. 그저 그 순간에 그런 마음이 들었을 뿐이다.
어느 날, 전화기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만 흘러나왔다.
“잘.......있었어?”
“누구시죠?”
사실 난 이미 누군지 알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때이미 난 누군지 알았던 것 같다.
내가 초능력이라도 가진 걸까, 아니면 인간이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 중 한 가지가 또다시 발휘 된 걸까.
“나.......선아야.”
그녀의 이름을 듣는 짧은 순간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녀를 만나고 난 후 나타날 여러 가지 부작용, 혹은 그녀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도 있었다.
“만날 수 있을까?”
그녀의 말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시간이 해결해주기에는 우리는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얼마 후, 그녀는 회사 건물 밖에 와 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예전과는 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평범한 캐주얼 차림에 운동화까지, 내가 알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듯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오랜만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어색하고 이상했다.
한때 살을 부비고 서로를 미치도록 탐닉하며 살았던 사람이 왜 이리도 어색해진 걸까?
우리는 자연스레 걷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없이 한동안 해안도로를 걸었다. 그곳엔 가끔씩 지나가는 차들뿐 아무도 없었다.
“여기 와 본적 있어?”
내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아니, 처음이야.”
“어때?”
“좋네.”
또 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 일까, 아니면 내가 변했기 때문일까.
그렇게 한참을 걷다 우리는 바다를 보고 있는 벤치에 앉았다.
영화 속에 나오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바다는 아니었지만 고즈넉한 느낌은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시골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잘 지내는 거 같아 보기 좋네.”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 되돌리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나랑 다시는 안 볼 거 같더니…….”
내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잖아.”
“그래, 그렇지…….”
“어떻게 지내?”
그녀를 만나자마자 묻고 싶었던 것을 이제야 물었다.
“잘 지내고 있어.”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행이네.”
“윤재씨 소식은 들었어.”
“그럼 다 알고 있겠네. 여전히 이렇게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걸.”
그녀는 민망하다는 듯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머리 스타일이…….”
나는 손짓으로 대신 말했다.
“으, 응.”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만지며 또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상황, 만남에서만 나오는 적절한 웃음 이었다.
웃음이 분명하지만 진정한 웃음과는 너무도 다른 그런 웃음이 있다.
그동안 그녀를 만나게 되면 묻고 싶었던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제 궁금하지 않았다.
“나, 작은 커피숍 하면서 살고 있어.”
사랑보다는 성공에 목말라 했던 그녀가 커피숍을 하고 있다는 말에 나는 놀라서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이상하다. 그때는 그렇게 성공하고 싶어 하던 사람이 지금은 커피를 만들고 있다는 게…….”
“그러게 말이야. 그때는 그랬지. 근데 지금은 커피 만드는 게 더 행복하고 즐거워.”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내말에 그녀도 나도 웃었다.
이번에는 왠지 어색하지 않은 순수한 웃음 같았다.
“결혼은 했어?”
내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한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게 과연 자연스러운 걸까?
나는 그 어색한 상황을 재빨리 벗어나려 했다.
“그때는........내가 미안했어.”
갑작스런 나의 사과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아냐. 내 잘못도 있는걸 뭐. 좀 더 설명을 해줬어야 했는데........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 그렇지?”
“아냐, 아냐.”
나는 손사래를 쳤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잘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녀가 말했다.
"나도……."
내가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
그녀에게 묻지도 않았고 그녀가 말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나 몰래 그 사람을 만났던 게 아니란 것을.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몇 등분으로 나눠 이건 누구의 잘못이고 저건 누구의 잘못이라고 따지는 것이 모두 부질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나의 사랑과 관심을 얼마나 부담스럽게 느꼈을지.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 그녀는 분명 내게 더 관심과 사랑을 주지 못한 것에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를 갈라놓았던 진짜 이유를 우리는 이제야 알고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를 갈라놓은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자신을 믿지 못했고 사랑하는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했다. 그것이 우리를 갈라놓은 것이다.
항상 당당하고 도도해 멀게만 보였던 그녀는 이제 친근한 친구처럼 보였다. 옷차림 때문 일수도 있고 화장, 머리스타일 때문 일수도 있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윤재씨.”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 당신이 해준 김치찌개가 너무 먹고 싶어서…….”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 나를 죽음의 끝까지 가게 만든 여인이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다.
우리의 혼란스럽던 과거를 모두 벗어던진 채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수줍게 다시 만났다.
우린........다시 사랑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