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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원 Dec 25. 2016

내게도 크리스마스


"그래도 크리스마스라고 선선한 바람이 부네."

"그러게."

나의 말에 반응하듯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어디선가 불어온 작은 바람에 마치 잔잔한 물결처럼 부드럽게 날렸다.

그녀도 바람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사실 세부에서는 외부에 나가기 싫다. 후덥지근함과 매연, 바닷가의 습함이 뒤섞여 피부가 숨을 못 쉬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다.

연말 그리고 크리스마스라서 주변에 사람들은 많았다.

우리는 밥을 먹고 맥주를 하나씩 사서 길거리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우리가 늘 아는 필리핀 세부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의 따뜻한 가을밤 정도 였을까.

귀하게 자란 그녀, 까칠한 그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것은 새로움에 대한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이었을까.

이해타산을 따지는 표정이 아니라 맑고 순수한 아이처럼 여름밤의 크리스마스를 즐겼다.

맥주 한 캔이 그토록 시원하고 짜릿할 수 있을까. 심지어 술을 먹는게 고통인 내게.

그림 같은 풍경과 황홀한 조명등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귀를 녹이는 라이브 밴드의 음악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여름밤, 맥주 한 캔, 별빛, 크리스마스, 그녀, 그녀에게는 나.

내평생 나에게 그토록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 적이 있었을까.

저급한 정치공작, 테러리즘, 아동학대, 가난과 전쟁도 종일 봐야만 하는 종이 쪼가리의 글자들, 치열한 취업, 기계 같은 직장인의 삶까지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와 난 많은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 그 순간이 얼마나 평화로운 시간인지 알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에는 하얀 눈이 오고 손을 호호 불며 두꺼운 점퍼를 입고 화려한 도심 속 조명 숲을 걷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여름밤의 크리스마스는 그것과 완전히 다른 기분을 준다.

나는 하늘을 한 번 보고 그녀를 한 번 보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가슴속을 때리는 설렘, 나는 그 짜릿한 설렘이 너무 좋았다.

시간이 내 마음도 모르게 흐르고 크리스마스의 밤은 저물어 가고 있었고 나는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거란 슬픈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남은 일 분이라도 그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렇게 세부와 그녀는 내 가슴속에 새겨졌다.


화려하고 요란한 크리스마스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완벽히 기억에 각인될 크리스마스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모든 시간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우리의 기억에는 스냅사진처럼 하나하나의 순간이 저장되어있다.

강렬했던 그리고 마음속에 품어왔던 그런 순간들 말이다.

내게는 그 여름밤의 크리스마스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일까 매년 크리스마스가 오면 그 순간이 기억의 저편에서 물 위로 떠오르듯 생각을 꽉 채운다.

12월 25일 자정까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길 기대한다.

하지만 나는 크리스마스에 선선한 바닷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오길 소망한다. 그리고 그 비릿한 바람을 벗 삼아 맥주 한 캔을 마시길 고대한다.                               우주 저멀리 반대편의 우리가 있었던 그곳에서 말이다.

그 시절 그 여름밤의 크리스마스는 어쩌면 한바탕 짜릿한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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