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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원 Jan 19. 2017

사랑이 떠나고 한 달

사랑이 떠나고 한 달


사랑의 시작은 두 사람의 합의가 있어야만 한다.

짝사랑은 접어두자.

하지만 사랑의 끝남은 한 사람의 의지만 있으면 실행된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다.

사랑은 쌍방향, 이별은 일방통행이다.


‘어머니 저 문 앞에서 죽어도 괜찮아요?’

옆집 아주머니에게 온 문자다. 아주머니는 고스톱을 치다 말고 야밤에 집으로 뛰어갔다.

물론 이 말을 하기 전에 수없이 많은 문자를 받았지만 인지하지 못했다.

아주머니의 아들 녀석이 7년 동안 사귀었던 여자에게 일방적 통보를 하고 끝낸 결과다.

여자는 혼란스러울 것이다.

갑작스러울 수도 있고 예상했을 수도 있지만 상대방에 아직 마음이 있다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았을 때 몇 가지 단계가 있는데 첫 번째는 혼자서 끙끙 앓다가 서서히 받아들이는 스타일이 있고(나의 경우)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돌진하는 스타일들이 있다.

그녀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그녀가 이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녀석을 아직 너무 사랑해서?

아니면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남과 동시에 밀려오는 외로움의 쓰나미가 목을 죄어와서?

사실 이제 막 끝난 연인 사이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사랑하는 연인에서 한 순간에 스토커로 취급받게 되는 일은 다반사다.

많은 연인들은 헤어지고 혼란스러운 시간이 있다.

이별에는 숙려기간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것에 어떠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끝난 후에는 어딘가가 너무나 아픈데 의학적 혹은 과학적으로 밝혀 낼 수도 없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어느 순간이 되면 그 아픔은 서서히 줄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겨울 시베리아 한 복판에 던져진 쓸쓸함과 아픔이 이별 후에 찾아온다. 내가 받아들이던 받아들이지 않던 상대방은 떠난다.

꿈같았던 시간은 정말로 꿈이 되어버린다.

나는 그녀를 위해 존재했던 사람이었다.

나의 가치는 그녀가 있을 때 빛을 발현했다.

그렇다면 나는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일까.

밥은 마치 모래알 같다.

더 이상 맛을 느끼지 못한다.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다.

그저 사랑의 쓰디쓴 뒤끝만 느껴질 뿐.

이별 후 한동안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수많은 이별 남녀가 있다.

그렇게 영혼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을 집에 찾아오는 잡상인을 대하듯 떠나보내는 우리는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처음 사랑이 시작될 때 상대방이 좋아 조심하고 배려하던 우리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결정했으니 우리 관계는 끝났다고...

매몰차게 돌아선다.

먹먹한 작별의 악수도 없이 말이다.

우리는 또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고 정성을 다할 것이다. 그러다 그것이 다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담배꽁초를 버리듯 버릴 것이다.  그 담배 꽁초도 방금까지 소중한 담배 한가치였다.

결국 슬픔은 모두 남겨진 자의 몫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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