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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May 29. 2022

9년 만의 뮤지컬 관람

내가 사는 동네에 드디어 예술의 전당이 생겼다. 지난달에 개관했다. 개관 며칠 후에 <지킬 앤 하이드> 뮤지컬 공연이 이번 달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듣자마자 예매사이트에 접속했는데 1,071석 중 R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S석도 맘에 드는 자리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뮤지컬 관람 의사가 있는 큰 딸과 내 몫으로 2층 앞에서 세 번째 자리를 예매했다.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있긴 했지만, 그나마 두 자리가 나란히 붙어 있는 S석 중에서는 가장 앞자리였다. 평소에 문화혜택을 누리지 못했던 우리 동네 사람들의 뜨거운 문화향유 열망을 여과 없이 경험해볼 수 있었다.




9년 만에 가져보는 뮤지컬 관람 기회에 한껏 들떴다. 자리가 너무 멀어 잘 안 보일 수 있겠다 싶어 노파심에 쌍안경도 구입했다. 무게는 조금 나가지만 배율이 높은 걸로 구입하고 오매불망 오늘만 기다렸다. 지킬 역은 뮤지컬 배우 중 <은지킬>이란 닉네임으로 사랑받은 박은태 님이었다. 엠마 역은 소녀시대 수영님의 친언니 최수진 배우님, 루시 역은 해나 님이 열연하셨다. 루시 역에는 원래 EXID 전 리더였던 정유지 님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발목 부상으로 해나 님이 대신 출연하게 되었다.


무대가 생각보다 가깝게 느껴졌지만, 배우의 섬세한 표정까지 볼 수는 없어 가져 간 쌍안경을 요긴하게 사용했다. 옆자리에 홀로 관람하시던 남성분도 내 것보다는 사이즈가 작았지만 수시로 쌍안경을 사용하셔서 그다지 민망하지 않았다. 인터미션 후에는 딸도 종종 쌍안경으로 감상하면서 자리 콤플렉스를 덜어냈다.




공연 전 <지킬 앤 하이드> 뮤지컬 줄거리를 찾아봐서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공연에 등장하는 노래를 거의 알지 못해 기대했던 것만큼 흠뻑 즐기지는 못했다. 귀에 익숙한 곡이라곤 <지금 이 순간>이 전부였으니... 역시 뭐든지 아는 것만큼 느낄 수 있는 듯하다.


9년 전에 관람했던 <그날들>은 고 김광석 님의 노래를 거의 다 알고 있어서 굉장히 즐겁게 감상했었는데. 템포가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걸 좋아하기에 이런 장면에서는 어깨를 들썩이며 신나 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두울 수밖에 없는지라 배우들의 열연과 엄청난 성량의 노래에 압도당해 물개 박수만 부지런히 쳤다.




쉬는 시간까지 약 3시간에 육박하는 공연이 다 끝나고 드디어 무대인사. 마지막 공연이라 뿌듯함과 후련한 만족감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배우들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가장 박수소리가 컸던 건 역시나 우리 은지킬님이 등장하셨을 때. 나는 2층이라 얌전히 자리에 앉아서 박수만 쳤지만, 1층 앞자리에 앉은 분들은 거의 다  기립박수를 치고 있었다. 다음엔 꼭 앞자리 R석 예매에 성공해서 나도 일어나서 박수치고 싶다.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었지만, 공연 전에도 인터미션 중에도, 공연 직후에도 촬영을 원하는 관객들의 줄이 길어서 포기했다. 하지만 인근 편의점에서 달달한 음료수로 정신을 차린 후, 다시 한번 도전장을 내밀었다. 아쉽게도 X 배너가 일부 이미 치워지고 있었다. 사진 못 찍는다는 딸의 구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딸의 독사진을 여러 장 찍어준 후 아쉬움을 살짝 안고 집으로 향했다.




예술의 전당에서 우리 집까진 걸어서 불과 40분 남짓 거리다. 평소에 내가 1만 보 걷기를 하며 즐겨 찾는 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어서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집으로 가는 길에 관련 동영상을 몇 개 찾아봤다. 무대인사 중에 은지킬님의 셔츠 찢는 세리모니를 제대로 보지 못해 속상했는데 은혜롭게도(^^) 살짝 다른 버전의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다른 배우님들이 열연한 다양한 <지킬 앤 하이드>를 감상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딸과 내가 둘 다 가능한 시간대는 일요일 오후가 유일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카이 님과 전동석 님의 출연분도 맛보기로 살펴봤다. 지킬과 하이드가 대결을 펼치는 장면이 가장 압권이라 할 수 있기에 컨프런테이션의 넘사벽이라 알려진 류정한 님의 열연 장면도 감상하다 보니 일요일 저녁이 순삭이었다.




문득 9년 전 <그날들>을 보고 난 후 무영님으로 출연하신 오종혁 님에게 흠뻑 매료되어 한동안 지냈던 게 기억난다. 직장 동료분 둘과 함께 본 후 너무 좋아서 남편과 다시 한번 봤더랬다. 이후 서울을 떠나게 되어 뮤지컬을 볼 일은 없었다. 연극, 공연, 콘서트, 마술, 코스프레를 즐기려고 서울을 비롯해 타 지역행을 한 적은 있지만 뮤지컬을 보러 간 적은 없었다.


생각해보니 태어나서 오페라를 직접 본 적도 없다. 참, 문화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 온 듯. 마침 다음 달 마지막 주에 <라 트라비아타> 오페라를 상연한다. 뮤지컬보다는 진입장벽이 높아 망설이는 큰 딸을 꼬드겨 방금 2장을 사버렸다. R석, S석 모두 제일 가장자리만 듬성듬성 남아있길래 쌍안경을 믿고 남아 있는 A석 중 가장 가운데 자리로 예매했다. 이렇게 매달 소소하게 누리다 보면, 아직은 낯선 클래식 공연에도 올해 안에는 도전해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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