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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Aug 12. 2022

여름휴가가 남긴 세 가지

휴가 첫날 견진성사 때 대모님을 해주신 분의 어머님께서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미혼이신데도 흔쾌히 대모님을 해주셨던 분이라 먼 길이었지만 부고를 접하자마자 바로 찾아뵙고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켰다. 상주께서 무남독녀이신 데다 가족을 꾸리지 않으셨기에 빈소가 적막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주변 이들에게 따뜻한 마음 건네며 신실한 삶을 살아오신 덕에 나처럼 베풂에 보답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걸음을 했다.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신 분이라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는 기관장들은 화환으로 조의를 표했다. 장례식장을 찾을 때마다 늘 느끼는 감정이지만 내 마지막 순간은 어떤 모습일지, 내게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이 깊어졌다.


중환자실에서 목도 가누지 못하는 어머님을 100일 가까이 홀로 돌보셨던 대모님 또한 여러 감정을 느끼셨던 듯싶다. 아침에 눈 떠서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웃으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셨다. '매사에 감사하라'는, 너무 평범해서 자칫 식상할 수 있는 문장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었다. 한편, 1인 가구로 살게 되실 대모님을 생각하니 홀로 사는 분들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사회적 연대가 제도적으로 마련되도록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매일 맞이하는 하루를 즐겁게 살겠노라는 다짐은 지키기 쉬웠다. 휴가기간이었기에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던 덕도 있다. 전날 폭우로 빈소에서 집까지 되돌아오는 여정이 험난해, 3년 만에 계획한 2박 3일 가족여행을 취소할까 잠시 고민했더랬다. 하지만 안전운전에 자신감을 보이는 남편을 믿고, 부침 심한 회사생활로 마음고생을 적잖이 했던 내게 재충전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충주와 영월을 경유해 평창으로 가는 길에 숙소에서 아이들과 함께 할 보드게임을 4개 구입했다. 에어컨도 없는 집에서 무더위와 매일 분투를 벌였던 남편과 아이들은 숙소에 꽤 만족스러워했다. 더블침대 3개는 세 아이들이 하나씩 독차지하고 남은 퀸사이즈 싱글 침대 2개는 남편과 내 몫이 되었다. 집에서 누려보지 못하는 호사를 잠시 만끽한 후 아이들과 새로운 보드게임 정복에 나섰다.


게임 승패에 집착에 가까운 열의를 보이곤 했던 아들이 그저 즐겁게 게임에 임한 덕인지 나와 두 딸이 번갈아가며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생소한 보드게임 룰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해 같은 편을 죽음의 길로 내몰기도 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실컷 웃으며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남편까지 동참하도록 한다는 당초 미션은 수행하지 못했지만 충분히 행복했고,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바닷물에 발이라도 적셔 보겠다는 이번 가족여행의 목표는 날씨 상황을 감안해 과감히 접었다. 대신 숙소 근처에서 해가 내리쬐는 양떼목장을 방문해 무려 7년 만에 다섯 명 온 가족이 나오는 가족사진을 남겼다. 큰딸과 비슷한 또래의 여성분이 보여 사진을 부탁했는데, 역시나 길쭉길쭉하게 잘 찍어주셨다. 5인 가족 중 큰딸과 나를 제외한 3인방이 위아래 모두 검정으로 빼입었던(?) 탓에 비주얼은 남루했지만, 모처럼 건진 가족사진에 꽤나 흡족했다.


10년도 전에 뉴질랜드를 방문했을 때 양털 깎는 모습을 참관한 뒤로 양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양은 최근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인근 양고기 집에서 양꼬치와 훠궈로만 만났는데... 손바닥에 건초를 얹어주니 양이 혓바닥과 아랫니로 여물을 먹음직스럽게 먹어댔다. 양에게 먹이 주는 찰나의 경험을 했을 뿐인데, 앞으로 절대로 양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결심이 섰다.


목장을 떠나기 직전, 막내딸이 양 눈의 동공이 가로로 길다고 알려줬다. 나를 비롯해 우리 가족 모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놀라워하며 무심히 지나친 양의 눈을 다시금 유심히 바라봤다. 동물 유형별로 동공의 모양이 다르고 양 외에도 말과 염소같이 넓은 시야로 포식자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동물들이 가로형 동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마지막 날은 도산서원과 문경새재를 거쳐 집으로 되돌아가는 게 당초 목표였는데 가족 몰래 강원랜드를 경유지로 찍은 남편의 독단으로 인해 문경새재는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이 날의 최대 난관은 점심메뉴 선정이었다. 맛집을 알아봐 어렵게 찾아간 태국 음식점은 폐업상태였다. 한우를 잠시 고민했지만 한 사람당 2인분은 거뜬히 먹는 가족 식성을 고려했을 때 30만 원 남짓을 점심비로 쓰는 게 꽤나 망설여졌다.


열띤 논의 끝에 가성비 높은 메뉴를 선택하기로 합의를 봤지만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세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게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아들은 부대찌개를 골랐다. 막내는 감자탕을 선택했다. 그나마 성격이 온순한 큰 아이는 중식을 추천했지만 대세에 따르겠다고 밝혔다. 고집이 센 아들과 막내 사이에서 누구 편을 들어도 원망이 쏟아지는 걸 피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가장 공평하다는 가위바위보로 승자를 가려내기로 했더니, 행운의 여신이 막내딸에게 미소 지었다. 감자탕을 내켜하지 않는 아들을 위해 매콤한 갈비를 넉넉하게 추가 주문했지만 아들은 마스크도 벗지 않고 점심 먹기를 거부했다. 고기를 잘라 앞접시에 놓아주면서 아들을 달래 봤지만, 본인이 원하는 메뉴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숟가락 들기를 거부하자 화가 솟구쳤다.


윽박지르며 혼내니 자존심이 구겨진 아들의 태도가 더 완강해지기만 했다. 결국 내가 꼬리를 내렸다. 용돈을 계좌 이체해주며 조금이라도 먹도록 유도했다. 아직 자존심이 채 회복되지 않았다고 느낀 아들은 밥에는 손도 안 대고 고기만 조금 먹는 걸로 내 정성에 화답했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가족여행을 내켜하지 않았던 것은 비단 코로나 탓만은 아니다. 여행을 하며 좋은 추억 못지 않게 씁쓸한 기억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행지를 선택할 때 남편은 자신의 선호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 가족의 의견은 거의 반영하지 않는다. 내비게이션으로 2~3시간이면 갈 거리도 이리저리 다 살피며 가는 탓에 두배 이상 소요되는 건 예사다.


밤에 술과 함께 홀로 시간을 즐기고 낮에 자는 올빼미형 바이오 리듬을 지닌 탓에 졸음운전으로 가족의 간담을 서늘케 한 적도 여러 번이다. 졸리면 쉬었다 가자는 제안도 묵살하고 자신만의 졸음 깨우기 의식을 진행한다. '소리 지르기, 자신의 뺨 때리기, 옆좌석 동승자에게 아무 말 대잔치 하기'가 그것이다. 아이들과 내가 앞자리 앉기를 기피하는 이유다.


여행지에서 외식을 원하면서도 정작 식당을 고를 때는 만장일치를 좀처럼 이루지 못해 아들과 막내딸 중 누군가로부터는 비난의 화살도 받아야 한다. 내 돈과 시간, 에너지를 쓰면서 불쾌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많으니 여행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던 거다.




그럼에도 앞으로 또 가족여행을 갈 거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YES'라고 답하겠다. 기분 나쁜 몇 번의 경험이 있었지만, 새로움과 즐거움이 주는 유쾌함이 부정적인 감정을 상쇄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이번 여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양의 가로형 동공만이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아니었다. 나무 없는 산을 일컫는 '민둥산'이 강원도에 실제로 있는 산이었다니. 서울을 대표한다고 생각했던 한강을 충주와 영월, 태백에서 만나볼 수 있다니. 지금으로 치면 기숙형 학원인데 도산서원이 이토록 아담하기 그지없다니. 방문하는 곳마다 느낌표를 찍을만한 경험이 끊이지 않았다.


여행을 기피하게 만든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도 이번에는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예능과 비트 빠른 댄스곡을 50개 가까이 미리 다운받아두었기 때문이다. 막내와 함께 인피니트의 노래를 감상하는 시간도 신났고, 나 홀로 엑소와 샤이니의 무대를 즐기는 시간도 감미로웠다.


다음 가족여행은 언제, 어디로 가게 될까?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지만 다음번에는 경비 생각에 먹고 싶은 메뉴를 건너뛰는 일은 없게끔 하고 싶다. 역시나 답은 책 출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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