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체로 소심하다. 아니, 대체로라는 말도 과분하다. 늘 소심하다. 이런 소심한 내 인생에서 용감했던 적이 몇 번 있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보니 용감했던 건지 무모했던 건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회사가 이중고의 위기에 봉착했다. 착실하게 남은 커리어를 설계하던 내 인생 항로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주말 내내 고민을 하다 월요일에 결심했다. 위기상황을 일단 받아들이고 새 좌표를 찍기로.
라이홀트 니버의 <평온을 구하는 기도>를 무척 좋아한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은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그 차이를 깨닫게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이번 주에 내가 경험한 우리 회사의 시련은 내게는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내 노력으로 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 달라진 상황 속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차선의 선택이라도 모색해야겠다 싶었다.
포기도 빨랐고, 이에 맞춘 행동도 빨랐다. 일단 불어공부를 그만뒀다. 이번 주에 있었던 퇴근 후 두 차례의 불어 수업은 기쁜 마음으로 제꼈다. 대신 한동안 손놓았던 다른 외국어에 전념하기로 했다. 아직은 공부의욕이 생기지 않아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놀랍게도 내가 상수라고 여겼던 이 상황을, 회사의 많은 동료들은 '바꿀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용기'를 내서 이 불합리한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용기 있게 울분과 소신을 쏟아내는 동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부끄러웠다. 나는 과연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상사의 눈 밖에 나는 것? 원하는 미래가 담보되지 않는 것? 직이 불안정해져서 생계를 잇지 못하는 것?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애꿎은 가족들에게 분풀이를 하기도 했다. 더 이상 일하기 싫다는 내게 토끼눈을 뜨고 '당신이 일하지 않으면 누가 일하냐?'며 반문하는 남편에게, '대학생 큰 딸도 알바하는데, 사지 멀쩡한 당신도 이제 나가서 돈 벌라'라고 되받았다. 공부랑 사이 안 좋은 고3 아들과 중2 딸에게도 '공부하기 싫으면 알바라도 하면서 앞가림을 하라'라고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아직도 나는 혼란스럽다. 이 모든 환경이 과연 내가 용기 낸다고, 내가 더 노력한다고 바뀔 수 있는 건지? 하지만 확실히 이건 분명하다. 지금은 일단 열패감과 자괴감에 휩싸인 내 마음을 위로해야 하는 시간이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