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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Jan 27. 2021

나를 성장으로 이끄는 플러스와 마이너스 <2>

내 인생의 첫 번째 마이너스

숯불구이!
할머니 손!!


벌써 며칠 째다. 학교에서 파하는 이 순간이 제일 두렵다. 반에서 가장 거친 아이를 필두로 해서 몇 명의 짓궂은 사내아이들이 나를 둘러싼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내 뒤를 쫓아오면서 연신 놀려댄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장면인데 전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아니, 이런 장면을 받아들이기에는 나는 너무 어리다

내 나이 여덟 살에 불과하니.


학교에서 집에 이르는 오리에 이르는 길을 내내 울면서 걷는다. 아이들의 놀림은 집 근처에 당도해서야 막을 내린다. 어제 이맘때에도 울었다. 내일 이맘때에도 또 울게 되겠지.


이 지겨운 장면들, 언제쯤 끝을 볼 수 있을까?




경기도에서 유치원까지 다니고 나서 전남 광주로 이사를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그네들에게 밉상 진상 3종 세트였다.


광주 사투리를 구사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표준어를 쓰던 나는, 자기네 언어를 이해하지도, 쓰지도 못하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다른 것이 틀린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미숙한 인식의 시기 아이들에게, 나는 친구가 아니라 할머니 손을 한 기이한 아이에 불과했다.


비 오는 날에도 우산 갖고 마중 나와 있는 엄마가 없어, 비 맞으며 집에 가는 몇 안 되는 아이 중 한 명에 속했기에 엄마라는 방어막이 부재 상태인 나는 함부로 해도 되는 아이에 불과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전남 쪽으로 전보발령이 난 아빠를 따라온 가족이 광주에 터를 잡았다. 8남매의 맏며느리였던 엄마는 매일 나주로 농사를 지으러 다녔고, 나는 나 홀로 학교를 다녔다.


갑자기 주어진 낯선 환경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고, 밤에 혼자 잔다는 것도 너무 무서웠다. 물론 매일 이렇게 혼자 살았던 것은 아니다. 어떤 장면에는 고모도 등장하고, 삼촌도 있다. 할머니가 계실 때도 있다. 하지만 내게 제일 필요한 엄마라는 존재는 거의 부재중이었다.


밤에 혼자 잠들면서 무서워서 엉엉 울면서 이불속에서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이 난다. 이층에 살던 분들이 올라와서 함께 자자고 했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자존심은 있어서 끝까지 버텼다. 그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한 것을 보면 당시 내가 느꼈던 공포는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안네 프랑크가 숨어 지냈던 다락방 속 공포와 견주어본다면 너무 과장일까?


어쨌거나 엄마는 맏며느리 역할을 소화하느라 어린 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난 부모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여 철없는 아이들의 좋은 놀림감으로 전락했다. 부모의 부존재로 나는 글로 쓰기 힘든 상황도 여러 차례 겪었다.




유치원 때 유일하게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쁘띠'라는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물론 본명은 아니다. 내 기억 어딘가에 그 아이의 이름이 있을 텐데 지금은 갑자기 이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 아이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나는 그 아이의 옆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모든 친구들에게 무척이나 밝았던 그 아이의 옆은 어느새 다른 친구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나는 나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이들의 무리 속에 내던져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스러움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모자를 쓰고 사진 한 컷을 찍는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다시 본 그 사진 속 나는 서로 나를 밀어대는 아이들 사이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모자는 비뚤어져 있는 채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내 얼굴은 모양새 이상한 모자 탓인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했다.


모두 다 반팔 옷을 입고 있는데 사진 속 나는 화상흉터를 감추고 싶어 긴소매 옷을 고집하고 있다. 물론 이런 나의 억척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손등과 손가락의 화상흉터까지 감추지는 못하고 있다.


변변한 친구 한 명 없이 보낸 내 유치원 시절, 활짝 웃는 얼굴이 단 한 장도 없는 유치원 단체사진들.




세 살 때 갖게 된 양손의 3도 화상의 진한 흔적으로 어렸을 때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가슴속 희망 하나 품고 살았다. 어른이 되면 다른 이들처럼 예쁜 손을 가질 수 있다는 그런 희망.


대학생이 되어 맞이한 첫여름방학, 부푼 가슴을 품고 병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나는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말 한마디에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화상은 피부이식을 해야 하는데 나는 화상범위가 너무 커서 이식할 곳을 찾기도 어렵고, 당시 기술로는 이식을 해도 피부색이 변색되어 오히려 이 상태로 사는 게 낫다는 것이다. 다만 굽어있는 손가락 몇 개를 펴기 위해 서혜부 살을 떼어야 한다고 했다.


넷째 외숙모와 함께 동행했던 지방대 병원 문을 나서던 그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병원 안에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변함없이 맑은 여름의 초입이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 안의 세상은 잠시 멈춰있었다.


그럼, 이제 나는 평생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속에서. 순간 참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스무 살 여름, 나는 8시간에 걸친 수술을 했고, 수술 결과가 과히 좋지 않아 손에 또 다른 상처를 갖게 되었다. 수술 직후에 만난 내 친구는 일곱 개 손가락마다 마디 사이에 새로 생긴 피부들을 보면서 '인두로 지져놓은 것 같다'면서 예전 굽은 손가락이 더 낫다고까지 했다.


게다가 수술 중 뭐가 잘못되었는지 오른손 새끼손가락에는 네임펜으로 쭉 긁어놓은 것 같은 갈색 선도 생겼다. 피부를 떼어내고 꿰맨 서혜부의 실밥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아 27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가끔 그 부위의 곪은 잔해들을 발견하곤 한다.


다른 친구들이 매니큐어 바르면서 한참 멋 낼 때도, 나는 손에 치장하는 것은 질색이었다. 안 그래도 돋보이는 손인데 뭔가 장식을 해서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끌 아무런 유인가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반지라는 것을 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반지를 사러 가서 손을 내민다는 것도 과히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고, 남들처럼 여 보란 듯이 손을 보여줄 자신이 없어 더더욱 그렇다.




피아노가 그토록 배우고 싶었지만 손등과 손가락들을 적나라하게 다 보여준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셋째까지 낳고 나서야 도전할 수 있었다. 다행히 나이가 들면서 지독한 열패감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어렸을 때는 떡하니 내 가슴속 안방을 차지하고 있던 내 양손의 존재감이 모퉁이 손님방으로 건너가게 된 건, 사실 내 노력의 결실만은 아니다. 세월의 더께를 입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내 몸과 함께 한 세월의 관록만큼 내 부족한 몸을 보듬고 함께 지내는 법을 터득했다.


손뿐만 아니라 신체 다른 부위도 탄력을 함께 잃어가는 시기이고,  '할머니 손'이 자연스러운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는 덕이기도 하다. 덕분에 어렸을 때처럼 부자연스럽게 손을 내려놓고 감추기에 급급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감추려 할 때는 더 잘 보이던 흉터들이, 그저 자연스럽게 행동하다 보니 오히려 눈에 잘 띄지 않기도 한다.




내가 인생을 열심히 살게 된 첫 번째 계기는 내 양 손 덕분이다. 평범한 손을 갖지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견디기 힘든 놀림을 받아오곤 했던 나는 '존중'받고 싶은 단 한 가지 이유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덜 짓궂어져서인지, 내가 공부를 잘하게 되어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놀림은 그쳤다.


공부 잘하는 아이로 등극해 선생님들에게, 급우들에게 존중받고 관심받는 경험은 꽤나 기분 좋았다. 더 이상 놀림받지는 않지만 이후에도 계속 공부를 하게 된 이유다.


함부로 대해지는 이로 전락해 뻥 뚫린 가슴속 공허함과 비참함을 경험하게 된 나는,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 나를 뜨거운 삶으로 이끌었던 첫 번째 결핍 요소인 양손의 화상에 대한 콤플렉스는 이젠 어느 정도 극복했지만,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또 다른 마이너스 요인들이 내 앞에 걸림돌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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