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마음고생 꽤 했습니다. 점수가 계속 안 나오니 와이프가 심지어 저한테 ‘공부머리가 없다’는 이야기까지 하더라고요.”
“이번에 점수 나와서 이제 집 안에서 위상이 높아지셨겠어요.”
“아니요, 와이프는 ‘아이엘츠가 쉬운 시험이었구나.’라고 말하던데요.”
며칠 전 퇴근길에 우연히 만난 동료와 나눈 대화다. 동료는 사내 유학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그동안 부지런히 외국어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20여 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해왔기에 조직기여도는 인정받았지만 어학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어렵사리 갖게 된 기회를 놓칠 수 있어 마음 졸이며 향학열을 불태우던 차였다.
다행히 동료는 유학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지만, 준비하는 과정 중에 가끔 아내의 등쌀을 힘들어했다. 동료의 아내는 쉼 없이 자기 계발을 하는 열혈 워킹맘으로 알고 있다. 동료는 나름 노력했지만, 이런 아내의 높은 기대치를 충족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
동료와 유학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8년 전에 내가 유학시험을 준비하던 때가 떠오른다.
“이제 토플 학원을 그만 다니겠소.”
“아니 왜? 열심히 하면 1년짜리 단기 연수는 갈 수 있다면서?”
“1년간 학원을 다녀보니 토플이란 시험은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시험이라는 것을 깨달았소. 도전해보고 싶으면 이제 당신이 유학시험을 준비하시오.”
“그럴까?.”
“하지만 나는 함께 나갈 생각은 없소.”
“내가 어떻게 혼자 나가서 공부하면서 세 아이들을 돌볼 수 있어? 함께 나가야지.”
남편은 가끔 이렇게 합쇼체로 말을 한다. 꺼내기 좀 거북한 대화일 때 그런 경향이 있다. 1년 전, 남편이 긴 방황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맨 먼저 한 일은 영어 시험 관련 각종 책을 종류별로 골고루 산 거였다. 이내 새벽반 영어수업을 듣는 열혈 행보를 한동안 이어갔다. 그런데 정작 토플시험을 치르지는 않아서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됐다.
남편이 학원을 다니며 토플을 공부할 때 가끔 어깨너머로 살펴봤다.
‘어떻게 저렇게 긴 문장을 듣고, 읽을 수 있지? 게다가 말하고 쓰기까지?’ 남편을 통해 느껴진 토플은 낯설고 어려운 존재였다. 그랬기에 남편으로부터 유학시험 도전 바통을 넘겨받았지만 선뜻 결정하기 어려웠다. 아니, 결정하기 싫었다.
당시 나는 1년에 365권 읽기 프로젝트 3년 차에 들어와 조금씩 작가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서천재가 된 홍대리>와 비슷한 컨셉으로 <육아 천재가 된 홍대리>라는 가제로 씨앗 글을 써서 다산라이프에 투고도 해보고, 나와 비슷한 꿈을 지닌 분과 공저 계획도 다져가던 중이었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토플의 벽을 넘어 점수를 확보하고, 치열한 사내 경쟁을 뚫고 어렵사리 기회를 갖게 된다고 해도 이후에 닥칠 난관을 생각해보니 유학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숨만 쉬어도 낯설고 힘든 외국생활일 텐데, 홀로 아이 키우며, 마흔 다되어 공부한답시고 고군분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가슴 안 깊숙이 저장해뒀던 ‘박사’에 대한 열망이 떠올랐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꿈은 박사가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늘 ‘강 선생’이라고 부르셨다. 제법 공부를 했던 나를 치켜세우는 애정 어린 호칭이었다. 하지만 나보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두 살 터울 남동생은 ‘강박사’라고 부르셨다. 아들이 크게 성공하기를 바라셨던 열망이 담긴 칭호였다.
그럼에도 내겐 마음의 상처였다. 아무리 부모님께 인정을 받고 싶어도 생물학적 성의 장벽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기필코 박사가 돼서 아버지로부터 ‘강박사’라고 불리고 말겠다는 각오를 다지곤 했다. 일상에 치여 그동안 잊고 지냈지만 ‘작가’라는 뒤늦게 갖게 된 꿈보다 ‘박사’라는 원조 꿈부터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싶어 졌다.
결심을 하고 나니 저돌적인 행동지향적 성격이 빛을 발했다.
독서와 글쓰기를 비롯한 모든 가외 활동을 그만두고 일단 토플학원부터 등록했다. 회사 근처에 있는 학원에 마침 토플 초급반이 개설되어 있었다. 하지만 수강생이 미달되어 폐강되고 중급반과 함께 수업을 듣게 되었다. 2012년 5월, 새벽반 수업을 한 달간 들었다. 뭔가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학원만 오가는데 만족하며 한 달을 보냈던 것 같다.
새벽 수업이 6월에는 스터디로 이어졌다. 학원을 함께 수강했던 분 중 한 명이 메일로 스터디 제안을 해왔고, 홀로 공부할 생각에 막막했기에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스터디 버디는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직장인이었다. 우리는 토플 네 개 영역 중 가장 생소한 분야 중 하나인 스피킹을 중심으로 6주 동안 매일 종로 커피숍에서 이른 새벽에 만나 스터디를 했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몰라 당황해하며 대충 얼버무리기 일쑤였지만, 만나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진지해져 실전에 임하는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고3이라는 각오로 근무시간 말고는 영어공부에 매진해서 간신히 유학 티켓을 확보했지만, 내 우군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시댁은 물론이고 믿었던 친정도 내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올케, 유학을 갔다 오면 월급이 올라?”
“아니요, 박사과정은 긴데 장학금은 22개월만 나와요.”
“그럼 이후엔 어떻게 생활하려고?”
“마이너스 통장 3개 만들었어요.”
“00 엄마야, 애들이나 잘 키우지, 웬 유학 타령이냐?”
“유학 가면 애들이 자연스럽게 영어공부를 할 수 있잖아요. 제가 공부하니까 애들 학비는 다 무료예요.”
“그냥 한국에서 살지, 밖에 나가면 한참 동안 못 볼 텐데.”
“엄마가 저 있는 데로 한 번 놀러 오시면 되죠.”
시댁의 반대 이유는 결국 딱 하나였다. 내가 남편의 창창한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것이었다. 휴직을 기필코 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남편이 홀로 수년을 지낼 자신이 없었는지 마지막 순간에 휴직을 결정했다. 잘난 아들에 비하면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은 며느리가 아들의 미래에 걸림돌이 되는 게 못마땅하다는 게 이유였다. 유학을 다녀와도 승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월급이 오르는 것도 아닌데, 사비까지 엄청 들여가며 아들 인생을 꼬이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친정이 반대하는 이유는 딸의 안위였다. 낯선 이국에서 행여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었다. 자녀를 많이 갖고 싶었지만 건강상 이유로 딱 둘 밖에 낳지 못했던 어머니는 나와 남동생이 사고라도 당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셨다. 자녀들이 불혹을 훌쩍 넘은 지금도 친정어머니는 매일 정화수를 떠서 자식들의 건강과 안전을 비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실 정도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양가의 반대는 오래 지속됐다. 가지 말라고 하니 더 가고 싶었다. 오히려 유학 가라고 등 떠밀었으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2013년 7월 끝자락에 캐나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온 가족이 몸을 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시댁과 친정 모두 내겐 일종의 ‘악마의 변호인(devil’s advocate)‘이었던 것 같다. 그분들의 진의까지야 알 수 없지만, 일단 나는 그분들의 말 이면에 담긴 선의를 찾고 싶다. 어쨌거나 유학행 이후 우여곡절 끝에 남편은 퇴직을 하게 됐으니 내 유학이 남편의 미래 향방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친 것은 맞는 듯싶다. 늘 걱정하시는 엄마께 폐 끼치지 않으려고 공부에만 전념한 덕분에 무사히 유학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내 동료에게도 아내의 존재가 이렇지 않을까. 질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남편의 승부욕을 고취시키기 위한 츤데레형 사이다급 발언! 동료의 멘털이 강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