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서치 힐데 May 21. 2021

의지력 총량의 법칙


ENFJ 유형이다. 내향적으로 타고났지만, 20년 간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회사가 원하는 외향형으로 성격이 변해갔다. 내향 49%, 외향 51% 결과가 나온다. 침묵이 감도는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 대화를 주도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개복치 성격답게 다른 이들의 눈치를 많이 보기에 껄끄러운 대화는 피하는 편이다.


계획 세우기를 무척 좋아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겠노라고 결심하는 것도 좋아한다.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순간만큼은 온몸에 감도는 좋은 호르몬이 대량 방출되는 느낌이다. 내 인생에서 계획이 최초로 등장했던 때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당시 유일한 학습지였던 <완전학습>을 구입하면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속지 제일 앞 장에 매일의 날짜와 공부해야 할 분량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계획이 늘 틀어진다는 걸 그 어린 나이에도 인지했던 건지, 최초 계획은 연필로 기록했다. 며칠 지나면 계획만큼 달성하지 못해, 수정계획을 검은색 볼펜으로 세웠다. 한 학기가 끝날 때쯤은 수정 계획이 잇달아 <완전학습> 앞 장은 형형색색의 볼펜 색으로 뒤덮이곤 했다.




계획을 세우는 습관은 중학생이 되자 더 빛을 발했다. 특히 영어공부를 할 때. 아버지가 시사영어사 문고판 영한대역문고를 사주시곤 했다. 받아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매일 읽을 분량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계획수립 역량이 좀 더 진화했다. 예전 사람들은 영어사전을 한 장씩 찢어서 외우고 다 암기하면 먹어버리곤 했다는 전설을 들은 후, ‘사전 암기 프로젝트’를 스스로 가동했다. 사전에 별이 붙어 있는 단어를 공책에 정리해서 외워버리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무모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시작한 이 거대 프로젝트는, 그러나 알파벳 A를 간신히 넘기는데 만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었고 N 언저리에서 중도 하차하고 말았다. 알파벳을 옮겨 적는 것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나면 정작 암기를 위한 시간과 열정을 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볼펜 자국으로 점점 볼록해지는 노트를 보는 만족감으로 대체하거나 하교하는 스쿨버스에서 기진맥진해서 자는 것이 일상이 되곤 하였다.




이런 식의 공부법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기록하느라 주객이 전도되어 막상 암기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거다. 지금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건 일본어다. 일본어 능력검정시험인 JLPT N2 시험이 이제 불과 한 달 보름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무척 어렵다. 암기해야 할 단어와 문법량도 어마어마하다. 작년에 N3 시험이 연거푸 취소돼서 호기롭게 N3를 건너뛰고 N2에 도전하는 건데, N3와는 비교가 안된다.


독해 문제는 문제만 한 페이지다. 직설화법을 피하는 일본인답게 얼마나 말을 꼬고 꼬았는지 여러 차례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감이 잘 안 온다. 존경어뿐 아니라 나를 낮추는 겸양어까지 등장하니 청해를 들으면서 나 자신이 땅을 파고 지하로 들어갈 태세다. 도대체 얼마나 겸손해져야 하는 걸까?


일본어 공부를 할 때 제일 먼저 하는 건 단어와 문장 적기다. 지난달부터 와카메 센세의 온라인 수업을 들으면서 매일매일 그날의 숙제를 하고 있다. 숙제와 녹음 인증샷을 공유해야 하기에 단어장 정리에 공을 들인다. 그런데 학창 시절부터 계속된 나쁜 습관이 잘 고쳐지지 않는다. 단어장 정리에 정성을 들이다 보면 힘이 빠져 정작 암기해야 할 때쯤엔 의지력이 다 고갈되어 버린다. 공부할 의지도, 에너지도, 시간도 남지 않을 때가 많다.




쓰루타 도요카즈는 <어중간한 나와 이별하는 48가지 방법>에서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이거다!' 싶은 중요한 행동과 업무를 위해서 의지력을 아껴두라고 조언한다. 취사 선별해서 우선순위가 낮은 것에는 구태여 의지력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자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라는 거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숀 아처도 <행복의 특권>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 책에는 실증결과까지 수록되어 있어 제대로 설득당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곧잘 실패하곤 하는 건 우리 의지력 저장고를 과대평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지력 창고는 화수분이 아니다. 쓰다 보면 어느 순간 텅 비게 된다.


직관적으로만 알려졌던 의지력 저장고에 관련된 진실은 로이 바우마이스터라는 심리학자가 초코 쿠키 실험을 통해 입증했다. 대학생들을 실험실에 모아놓고 세 시간가량 아무것도 먹을 것을 주지 않은 뒤, 이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다소 유치한 상황을 설정했다. 첫째 그룹에는 초코 쿠기와 무가 담긴 접시를 주면서 초코 쿠키는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다. 둘째 그룹에도 쿠키와 무가 담긴 똑같은 접시를 주었지만 이번에는 둘 다 먹어도 좋다고 했다. 셋째 그룹에는 아무런 음식도 주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경과한 후에 세 그룹 모두에게 쉽게 풀 수 있는 기하학 퍼즐을 몇 개 냈다. 실험그룹에게는 간단하다고 안내했지만, 사실 그 퍼즐은 절대 풀 수 없도록 일부러 조작해 놓은 것들이었다. 예상한 결과대로, 초코 쿠키를 먹지 말라고 강요당했던 첫 번째 그룹이 가장 먼저 포기했다. 초코 쿠키를 먹지 않기 위해 억지로 참는 동안 의지력을 소진했기에 골치 아픈 퍼즐을 풀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하루를 알차게 보내려면 고갈되어버릴 내 의지력의 창고가 텅 비기 전에 선택과 집중을 통해 중요한 곳에 의지력을 잘 분배해서 써야 한다. 의지력을 아끼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원하는 행동을 습관으로 만들어버리는 거다. 할지 말지를 망설이기도 전에, 그냥 저절로 하게끔 내 몸에 코딩을 하는 거다.


새벽 기상은 이런 코딩을 하기에 꽤나 훌륭한 습관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순간에는 의지력 창고가 풀로 충전된 상태다. 외국어 공부, 독서, 운동, 글쓰기와 같이 내 삶에 중요한 것들을 그다지 큰 힘 안 들이고 꼭꼭 채울 수 있다. 물론 새벽 기상에 성공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새벽 기상에 어렵사리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새벽 활동이 습관이 되지 않은 상태라면 약간의 부작용도 따른다. 출근 전에 이미 꽤나 의지력을 쓴 상태이기 때문에 업무 중에 쉽사리 피곤해진다. 그럼에도 초기 투자가 없이는 새벽 활동이라는 습관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권하고 싶다.




퇴근 후에는 일하면서 워낙 많은 의지력을 쓴 상태라 보통 사람들이라면 중요한 활동에 매진하기 쉽지 않다.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한다>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한 김유진 변호사님도 출근 전에 중요한 활동을 몰아서 하고, 퇴근 후에는 그냥 휴식을 취한 뒤 일찍 잠자리에 든다고 했다.


물론 의지력 창고가 엄청 큰 사람도 있다. 나의 인생 롤모델 김원준 전 교수님도 그렇다. 이 분은 의사로 재직하는 동안 인생 몸매를 만들고 4개 외국어 능력시험에까지 동시에 도전한 넘사벽 존재시다. 오늘 아침에 이 분 따라하기 흉내를 내봤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TED ED 쉐도잉을 하고, 일본어 공부를 했다. 유산소운동과 무산소운동도 했다. 운동하는 동안 움직이는 건 내 팔다리인데, 뇌 안 해마도 함께 운동하는 것 같다. 운동하면서 외우는 단어와 문장은 더 기억에 오래 남으니 말이다.


의지력 총량이 정해져있다고 퇴근 후에 의지를 쓸만한 일에 시간할애를 거의 못한다는 건 왠지 억울하다. 억울하면 지는 거다. 의지력을 남겨둔다고 일할 때 대충 할 수는 없는 노릇. 의지력 창고를 키우는 비법에 대해 고민해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다이어트 인생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