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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May 23. 2021

촘촘한 하루

가위에 눌렸는지, 남편이 힘들어한다. 살짝 건드려 악몽에서 벗어나게 한 뒤 시계를 보니 아직 5시가 채 안되었다. 다시 좀 더 잘까 하고 뒤척이다 새벽녘 잠은 더 잇는다 해도 수면의 질을 높이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오랜만에 새벽 기상을 해본다.


오랜만에 얻은 귀하디 귀한 새벽시간에 선택한 첫 번째 활동은 글쓰기. 일본어 공부와 운동 중에서 견주어보다 어제 일상을 기록해두기로 했다. 경계인 대신 초인에 한 번 도전해보겠노라고 결심하고 보낸 어제는 만족도로 따지면 100점 만점에 80점 정도 되는 듯싶다.




토요일 아침, 기상은 이르지 않았다. 딸들과 함께 한 다이어트 미션 종료일이었지만, 목표 달성이 어려울 듯싶어 1주일 동안 못 보게 될 웹툰을 실컷 보겠노라고 불금 밤늦게까지 무리를 했기 때문이다. 눈 떠보니 나보다 조금 먼저 일어난 막내딸이 단톡 방에 당당하게 체중 인증샷을 이미 보내 놓았다. 빨리 나도 인증샷에 동참해야 한다며 성화다. 큰 기대 없이 체중계에 올라갔다.


목표를 달성했다! 이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한껏 사기가 앙양된다. 2차 미션 달성일은 4주 후다. 매주 단위로 감량 목표치를 공유하고 아이들과 함께 아침을 챙겨 먹었다. 식탐이 워낙 커서 밥이 맛없다고 느껴본 적이 거의 없지만, 오늘따라 밥이 더욱 꿀맛이다. 금요일에 도착한 시어머니표 열무김치가 더 입맛을 돋운 덕분일까?


8시 57분부터 도서관 웹사이트에 접속해서 기다렸다. 매일 선착순 400명만 도서관에 입장할 수 있고 9시부터 사전예약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책을 빌리려면 사전예약이 필수다. 다행히, 오늘도 도서관 사전예약에 성공했다. 개관시간 10시에 맞춰 도서관에 가기 전까지 브런치와 블로그 이웃님들의 글을 읽고 있는데, 수학 공부를 막 시작한 막내가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한다. 아이 공부를 좀 돕다 인기척을 보이며 일어날 기미가 있는 남편에게 바톤 터치를 하고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도서관에 도착해 내가 좋아하는 자리를 찾았다. 운 좋게도 비어있다. 일본어와 불어 공부 거리, 반납할 책 3권, 노트북,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를 잔뜩 늘어놓으며 내 전용공간을 채웠다. 이제 이 직사각형 책상과 함께 7시간 남짓을 보내게 된다.


일단 감사일기부터 쓰기 시작한다. 하루를 마감하면서 감사일기를 쓰면 더 쓸거리가 풍부하겠지만, 아침을 열면서 감사할 거리를 찾다 보면 하루가 더 긍정기운으로 충만하게 된다. 부담되지 않도록 하루에 3 꼭지 정도만 간단하게 기록한다. 예전에도 간헐적으로 감사일기를 썼지만, 작년 12월부터는 매일 쓰려고 노력 중이다. 반년이 지나니 드디어 습관이 되어 이번 달에는 단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꾸준히 기록하게 됐다.




일본어 공부를 먼저 시작했다. 가장 약한 파트는 청해지만, 전날 핸드폰 안 파일을 정리하면서 실수로 N2 청해 기출문제들을 지워버린 걸 알게 됐다. 두 번째로 약한 독해에 도전했다. 오늘 풀 분량은 2012년 기출문제 한 문제다. 11번 문제 하나에 중문 독해가 3개가 따라오고 독해 지문당 소문제 3개가 있다. 문제 번호는 하나지만, 실제 풀어야 하는 문제는 9개인 셈이다.


와카메 센세 유튜브 수업을 듣기 전에 먼저 한 번 풀어봤다. 지문들이 다 재미있고 흥미를 자아낸다. 실제로 일본에서 출간된 책 안에서 발췌해서인지 내용도 낯설지 않다. 첫 번째 지문은 친환경 소비태도를 갖게 되는 일본인들과 이런 소비자의 취향 변화에 동참하는 기업의 이야기다. 두 번째 독해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면서 얻게 되는 부가 효과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 글은 이미지 요법 등으로 달리기 기법을 향상하는 것에 대해 소개했다.


쉽게 감정이입을 하는 편이다. 영화를 보다 우는 건 기본이다. 학창 시절 문학공부를 하다 <국경의 밤>처럼 깊게 공감하는 글을 만나면 공부보다는 작품 감상에 심혈을 쏟았던 추억도 많다. 유학용 영어공부를 할 때도 독해에 나오는 온갖 새로운 내용에 쉽게 마음을 뺏겼다. 잭슨 폴록을 소개한 지문을 읽은 후에는 꼭 폴록의 작품을 찾아보면서 호기심을 충족해야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JLPT 기출 단어와 문법 구문까지 공부하고 나니 어느새 정오를 훌쩍 넘겼다. 전두엽을 혹사했으니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책을 쉬엄쉬엄 읽으며 내게 휴식을 주기로 한다. 오늘 반납하려고 가져온 책은 장석주 작가님의 <내가 읽은 책이 곧 나의 우주다>, 성석제 작가님의 <투명인간>,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다.


성 작가님의 <투명인간>을 읽는 내내 영화 <국제시장>이 떠올랐다. 착하디 착하지만, 주변 이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주인공 '김만수'의 삶이 황정민이 분한 '덕수'의 인생 여정과 오버랩됐다. 덕수는 영화 말미에서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라고 독백하며 오열한다. 소설 속 김만수는 훨씬 더 유쾌하다.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기보다 그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투명인간> 속 등장인물들의 삶은 70년대와 80년대 한국사에 기록되는 굵직한 사건사고들과 어우러져 묘사되기에, 마치 생동감 넘치는 역사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워낙 흡입력 강한 문장을 구사하는 성 작가님 작품이라 그냥 앉은자리에서 뚝딱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무려 장서 3만 권 이상을 보유하고, 40여 년 간 80여 권을 써내신 장석주 작가님의 책을 읽은 후, 단상을 블로그에 남기고 나니 어느새 오후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내가 읽은 책이 곧 나의 우주다 by 장석주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금요일 퇴근 후에 들었던 불어 수업 내용을 단어장에 정리하면서 복습을 했다. 지난달 불어 수업은 나 홀로 들을 때가 많아서 띄엄띄엄하는 수준이라도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는데, 이번 달은 다른 수강생들이 몇 명 더 있어서 고작해야 10 문장 정도만 하게 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그 10 문장이라도 완전한 내 것이 되어 입에서 술술 나오면 좋으련만, 늘 관사가 틀리거나 시제가 틀린다.


매번 수업이 끝나면 이렇게 교재 안에 있던 문장도 다시 정리하고, 수업 시간에 배운 표현도 기록해두지만 머릿속은 늘 깨끗하다. 선생님이 질문할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이 "J'ai oublié(잊어버렸어요)."일 정도니. 함께 수업 듣는 다른 분들은 20대 대학생이라 살짝 기가 죽는다.


그래도 이렇게 매일 꾸준히 하다 보면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 불어 알파벳도 몰랐던 내가 이렇게 간단한 회화를 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다니. 긍정기운으로 급 충만해져 내게 셀프 '쓰담쓰담'을 해본다. 반백 가까운 나이에 집에서 뒹굴거리지 않고, 청년들처럼 도서관에 와서 열심히 뭔가에 몰입하는 이 자체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공부 인증샷을 스터디 버디에서 보냈다. 온라인으로 알게 된 영어, 불어, 일어를 공부하는 분이다. 직장인인 데다 나처럼 3종 외국어를 공부하는 분이라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꾸준히 공부한 걸 서로 공유한다. 이분은 마침 장기휴가를 받아 남편분과 여행 중인데, 휴가 중에도 공부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폐관 시간이 다가오니 마음이 바빠진다. 서고 대출을 신청해 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발터 벤야민의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빌렸다. 모두 장석주 작가님 책을 읽다 궁금해져서 빌리게 된 책들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파트 피트니스에 들려 운동을 하려다 내게 너무 가혹한 듯싶어 집으로 직진했다. 도서관에 가는 날은 점심을 해결하기가 곤란하다. 도서관에 머무는 7시간 남짓 사이에 점심을 먹겠노라고 외부행을 하다 보면 공부 리듬도 깨지고 시간도 너무 많이 쓰게 된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먹기에는 너무 출출해서 호두와 아몬드 같은 견과류를 조금 챙겨간다. 덕분에 집에 가는 길에는 늘 허기지다.




집에 도착해보니 남편이 사다 둔 치킨이 있다. 큰 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치킨 두 조각을 먹었는데, 아쉽다. 그렇다고 반찬을 새롭게 해서 한상 차려서 먹기는 귀찮다. 몸에 좋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낵을 비롯한 간식류가 눈에 밟힌다. <아웃사이더>를 읽으면서 이것저것 먹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 가까이 지나버렸다. 오렌지로 마무리를 하면서 과식한 만큼 조금 후에 운동을 가겠노라고 다짐해본다.


계획표에는 유산소, 무산소 운동을 해야 할 시간대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영어 스터디가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저녁을 너무 많이 먹은 탓에 아들 방에서 잠들어버린 거다. 오늘 영어 주제는 전기차다. 멤버들이 제안한 논제들은 기술진보로 달라질 향후 일상, 전기차와 수소차의 차이점, 전기차의 장단점, 비행 차량의 미래 등이다. 다행히 미리 사전 조사를 해둔 것들이 있어서 영어로 말할 토킹 포인트만 다시 확인했다.




10시 직후에 계획했던 일상들이 어느덧 마무리가 됐다. 2cm 도톰한 요가매트를 새로 구입한 기념으로 아들과 큰 딸과 합동으로 플랭크를 했다. 나는 2분을 큰 딸은 1분을 채웠고, 아들은 1분도 채 못 채웠다. 조지 후드라는 세계 플랭크 기록 보유자는 환갑이 넘은 나이인 작년 2월에 8시간 15분 15초를 기록했는데...


초인 흉내내기를 하며 보낸 하루였는데, 운동이 아쉽다. 세 아이들에게 함께 걷기 운동을 하러 가자고 제안해봤지만 다들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웬일로 남편이 옷을 챙겨 입으며 나를 따라나선다. 남편과 운동을 함께 하는 건 매우 드묾다. 바이오 리듬이 워낙 달라 생활 패턴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경쟁의식을 잘 느끼는 편이다. 나는 경보 수준으로 걷는다며 먼저 선방을 날렸다. 이에 질세라 남편도 자신도 꽤 빨리 걷는 편이라며 큰소리를 친다. 남편의 보폭에 지고 싶기 않아, 평소보다 더 속도를 냈다. 묘한 긴장감속에서 걷다 보니 나의 인생 미드 <모던 패밀리> 속 한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매일 조깅을 꾸준히 하는 클레어에게 도전장을 던진 남편 필. 클레어에게 계속 당하지만, 남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마지막 순간에 필이 이길 수 있도록 센스를 발휘한 클레어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나도 클레어처럼 되었다. 차이는 나의 통 큰 양보가 아닌 체력 차이로 인한 패배라는 거. 양말을 신지 않은 탓에 무리해서 걷다 보니 운동화에 발등이 쓸려서 욕심만큼 계속 속도를 내기 어려웠던 거다.




하루의 마지막은 일본어 읽기로 채웠다. 공부했던 독해 지문 3개와 문법 문장들을 여러 번 읽고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녹음을 했다. 자정 넘어까지 성실하게 하루를 채우고 나니 그 좋아하는 웹툰을 볼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인류는 자고로 금지된 것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한 듯 싶다. 웹툰을 실컷 봐도 되는 상황이 되니 열기가 아주 살짝 사그러진 걸까?


촘촘하게 채웠지만 만족도를 100점이 아닌 80점으로 매긴 건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아침 시간 활용이 충분치 않았던 것, 저녁을 과식한 것, 저녁 후 의도치 않은 잠을 자게 된 것. 남들이 보기엔 너무 지루하고 하품 나오는 하루였을 지도 모른다. 너무 자신을 몰아세우며 사는 건 아닌지라며 혀를 찰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남들 눈이 무슨 상관이람. 나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하루면 그걸로 충분하다.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촘촘하게 채워볼까나? 이제 감사일기 쓰고, 오늘 계획표부터 세워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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