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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May 25. 2021

타인에게 친절 베풀기

친절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20년 지기 동료분 중 한 분이 <톨스토이 인생 10훈>을 보내주셨다. '성공을 위해 일하기, 능력을 위해 생각하기, 젊음을 위해 운동하기, 지혜를 위해 독서하기, 미래를 위해 꿈꾸기, 구원을 위해 사랑하기, 주위를 살피기, 영혼을 위해 웃기, 기도하기'가 나머지 9가지 메시지다.


비호감을 갖는 분이 보낸 문자라면 무시하고 말았을 테다. 아침부터 웬 교훈이냐며 꼰대 취급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걸 보내주신 분은 새내기 직장인, 시보라는 불안정한 존재, 무직과 직장인 간 스펙트럼 회색지대에 자리할 때 함께 했던 분이다.


노련한 직장인이 되어서 만난 인연도 소중하지만, 철부지 직장인 시절 동료에 버금가려면 곱절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속세의 때가 덜 뭍은 시기의 인연이라서인지 마치 학창 시절 친구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메시지가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한동안 주춤했던 비전노트 쓰기나 꿈 쓰기 100일 프로젝트라도 가동해 봐야겠다는 기특한 마음까지 들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이들에게는 친절하다. 오바마는 이런 인류의 본질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것에 대해 늘 고민해왔다고 자서전에서 밝힌 바 있다. 물론 우리가 친절을 베풀기 어려운 타인의 범주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좁디좁은 세계 안에서 삶을 꾸리는 이의 타인의 규모와 범위는 활동량이 넓은 이보다 훨씬 더 좁을 테니.


내(內)집단, 내가 속한 이너그룹(inner group)에게 유독 더 친절한 건 집단주의 성향을 띤 문화권에서 더 강하게 표출된다. 정 많은 한국인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이런 점에서 전형적인 한국인이다. 무뚝뚝하게 업무를 추진하다가도 평소 호감을 갖는 이가 업무 파트너라는 걸 알게 되면 좀 더 정성스럽게 일처리를 하게 된다.




아이를 키우다 타인의 친절을 경험하기도 하고, 불친절을 경험하기도 했다. 기억에 강렬하게 자리한 경험은 아이별로 딱 한 개씩 있다. 모두 다 다른 시공간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2006년 경, 어느 여름날. 지방 친정에서 아이 둘을 키울 때다. 주말에 친정을 방문하면 주중에 못다 한 엄마 노릇을 하느라 늘 바빴다. 아이들을 데리고 시내를 나갔다 아직 어린 아들은 엄마가 데리고 귀가하시고, 큰 딸만 데리고 좀 더 돌던 중이었다.


갑자기 큰 아이가 코피를 쏟기 시작했다. 큰 아이가 종종 코피를 쏟긴 했지만, 밖에서 이렇게 비상상황을 맞이한 적은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갖고 있는 티슈가 없었다. 인근에 슈퍼도 보이지 않았다. 발만 동동 구르면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부탁했지만, 다들 외면하면서 지나갔다. 물론 그들도 갖고 있는 휴지가 없어서일 게다.


어떻게 뒤처리를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피 흘리는 아이를 끌고 정신없이 걸어서 결국 슈퍼에서 티슈를 구입해서 허겁지겁 뒤처리를 했던 것만 어렴풋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이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이후 외출할 때 티슈 없이 나가는 적이 거의 없다.




위 경험이 단순히 불친절이라고 단정하기란 쉽지 않을 거다. 나 역시 갖고 있는 휴지가 없는데 누군가 와서 도움을 요청한다면 만사 제쳐두고 티슈를 구하러 다녀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것 말고도 불친절이나 무례한 경험을 했던 건 꽤나 있다. 10대 시절, 버스에서 길가에서 언어적, 비언어적 추행. 만삭일 때 앉아있는 내게 자리 양보를 강요했던 어르신들.


그럼에도 불친절의 대표 사례로 이 티슈 기억이 떠오르는 건 내가 타인들에게 호의를 기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와 함께 하고 있으니 당연히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걸까?




2014년 캐나다 밴쿠버. 스케이트를 배우던 일곱 살배기 막내딸이 앞으로 넘어졌다.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얼굴 정면이 아이스 스케이트장에 부딪힌지라, 입술 주변이 피범벅이 되고 앞니 두 개가 심하게 흔들리게 되었다. 주변에서 자녀들 스케이트 수업을 참관하던 학부모들이 내 주위에 몰려들었다. 다들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들이 직접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치과가 문 열지 않는 주말이었다. 영어로 건네는 위로의 말이 모국어만큼 가슴에 큰 울림을 주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황없던 내게, 도움 줄 수 있는 피붙이가 단 한 명도 없던 이국 땅에서 낯선 이들이 건네는 위로는 인상적이었다.




기억나는 가장 최근의 호의는 10개월 전 일이다. 작년 7월 비가 잠깐 그쳐 오랜만에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며 신나 하며 나갔던 아들이 땅이 고르지 못한 곳에서 고꾸라졌다. 위 앞니가 1/3쯤 깨졌고, 가쪽 앞니는 뿌리는 남았지만 형태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옆 송곳니가 깨지고 잇몸도 다쳤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이를 만났을 때 우유팩을 들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러 간 남편이 사준 거였거니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지나가던 가족분 일행께서 깨진 이를 찾는 아들을 보며 괜찮냐고 물어보며 이를 담그라고 근처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다 주신 거였다.


이 분들은 남편이 도착할 때까지 병원을 함께 검색해주며 아들 옆을 지켜주셨다. 14년 전, 같은 한국 땅에서 무심한 행인들에게 서운한 마음을 품었던 나는, 또 다른 한국 땅에서 배려심 넘치는 행인이 베풀어준 친절에 깊이 감동받았다. 나 역시 이런 따뜻한 행인이 되겠노라고 결심했다.




스페인 적십자 봉사자가 세네갈 출신 난민을 위로하는 사진이 어제부터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다. 난민을 반대하는 극우세력의 집단 총공격에 당사자는 SNS를 비공개로 전환해야 했지만,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그룹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기폭제가 되었다.


우리나라도 3년 전, 제주 예멘 난민 사태를 겪으며 이분화를 경험했던 적이 있다. 평소에는 나와 의견이 꽤 잘 맞는 큰 딸이었지만, 이 이슈와 관련해서는 견해가 엇갈려서 약간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친절을 베풀고, 친절을 받으면서 살고 싶다. 타인의 친절을 통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친절을 나누면서 나도 다른 이에게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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