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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May 28. 2021

마지막 날, 남기고 싶은 유품

평일에 모처럼 맞는 휴일. 남들 다 쉬는 빨간 날이 아닌, 나만 쉬는 나만의 빨간 날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상대적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학교 간다고 부산 떨며 준비할 때 여유만만한 아침을 즐기는 게 이토록 기쁘다니. 전업주부 6년 차에 접어든 남편은 매일 아침, 이런 행복을 누린단 말이지? 묘한 질투심이 스친다.


평일 오전 시간 대에 집에서 편안한 시간을 누려본 게 언제 적인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집 바로 앞 초등학교에서 쉬는 시간마다 울리는 음악소리도 들린다. 비가 내려 밖은 어둡지만 내 마음만은 더할 나위 없이 맑다. 도서관 예약은 해뒀지만, 글 한 편으로 마음을 정리해둬야 오늘 하루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 듯싶어 노트북부터 켜본다.




매일 하루 일상을 공유하는 선배님이 계시다. 나는 주로 출근 전에 공부, 감사일기, 운동 인증샷을 보낸다. 선배님은 늦은 밤이나 익일 아침에 인증샷을 공유해주신다.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선배님이 보낸 톡을 확인했다. 인증샷에 더해 '무브 투 헤븐'이라는 넷플릭스 작품을 추천한다는 톡을 남기셨다.


뭐지? 외국 영화인가? 제목만 보면 왠지 그럴 듯싶다. 넷플릭스에 접속해보니 웬걸. 한국 드라마다. <나는 유품 정리사입니다>라는 부제는 충분히 흥미로워 보이지만 잠시 망설인다. 성격상 한 번 보면 정주행이 불가피할 것 같은데, 시작을 해야 하나. 다 보려면 10시간은 순삭이다. 망설임은 출연배우 확인으로 쉽게 끝난다. 이제훈님, 나의 최애 배우님 중 한 분이시다.




결국 오랜 시간 눈도 못 떼고 눈물, 콧물 다 쏟고 마쳤다. 마음이 바쁘니 잔인한 장면 등은 불가피하게 스킵했다. 띵작으로 가슴에 제대로 새겼으니, 두고두고 다시 보고 될 듯싶다. 내 마음만 뺏은 게 아닌가 보다. 이 작품을 보고 감동한 전 세계 시청자들이 여러 언어로 리뷰를 남겼다고 한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내 마지막 순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나의 죽음을 내 주변 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됐다. 극 중 고인들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을 단단히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 빈 공간과 틈을 '한 그루'라는 유품 정리사가 메워준다.


다행히 드라마 속 인물들은 뛰어난 관찰력과 기억력을 지닌 유품 정리사 덕분에 자신들의 추억 빈칸 퍼즐을 잘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를 터. 타인이 으레 짐작해서 정리해주는 것 말고, 나는 내 손으로 직접, 내게 소중한 이들에게 내 마음을 남겨두고 싶다.




내게 가장 소중한 이들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가족이다. 세 아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밟히고, 부모님이 나보다 더 오래 살아계신다면 부모님도 빠뜨릴 수 없다. 남편과 남동생, 조카들도 떠오른다.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들도 몇 떠오른다. 직장동료로 시작했지만, 친구처럼 가까워진 몇몇 인연도 챙기고 싶다.


10년 전, 써둔 나의 마지막 하루. 당시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기에 글이 영성으로 충만해 있다. 이때 이미 장기기증을 하겠노라고 결심했으면서도, 10년 간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58 나의 마지막 하루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방금 한국장기조직기증원에 장기기증 희망 등록을 마쳤다. 뇌사 시 장기와 인체조직, 각막을 기증하기로 했다. 기증하고 싶은 것만 골라내는 옵트 인이 아닌 옵트 아웃 형식이라 고민이 덜어진다. 이미 세 가지 항목에 체크가 되어 있기에, 기증하고 싶지 않은 게 있으면 체크를 해제하면 된다. 해제할 이유가 없는 대다수 사람들은 디폴트 조건으로 기증을 하게 될 거다.


처음 글을 시작할 때는 당연히 지인들에게 남길 물건을 선별하고 소중한 이들에게 남길 메시지를 중심으로 글을 엮어봐야지 했더랬다. 하지만 쓰다 보니 앞으로 지인들과 가급적 많은 시간을 함께 해야지라는 식으로 다소 싱겁게 결론이 나버린다.




평소에 좋은 기억과 추억을 많이 남겨두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드라마 중에서 제일 기억나는 문장이 딱 두 개 있다.


참 잘했어요
세상에서 제일 멋진 건 누구?
아빠 아들 한 그루


내 아이들이 이런 하늘 찌를 듯한 자존감과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해주고 싶다. 그루는 사실 입양된 아이다. 그루도 알고 있다. 야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음에도 이렇게 반듯하게 자라날 수 있었던 뒤에는, 무한사랑으로 그루를 감싸준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다.


칭찬받는 걸 좋아한다. 칭찬하는 것도 좋아한다. 진심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칭찬이 질책보다 효과적이라고 맹신하는 부류다. 남은 삶도 소중한 이들에게 칭찬세례 듬뿍 하면서 밝게 밝게 살고 싶다. 나 자신에게도, 내 주변 이들에게도 '참 잘했어요!' 빨간 도장으로 가득 찬 인생노트를 안기고 싶다.




배우분들을 좋아한다. 프로다운 모습을 흠모한다. 야스퍼거 증후군 비슷한 증상이 있는 지인이 있기에 탕준상 씨가 열연한 배역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진짜 이종격투기 선수처럼 비주얼 변신에 성공한 이제훈 씨를 보면서, 팬심이 더 두터워졌다. 꽤 오랜 기간 매진한 웨이트 트레이닝과 복싱, 이종격투기 연습의 결실이라고 한다.


작년에 업무차 봉사활동을 부탁드렸는데 흔쾌히 수락해주신 천사표 수영 배우님도 출연하셔서 후반부부터는 보는 즐거움이 더 컸다. 직장동료분과 외모가 닮아 만날 때마다 종종 대화의 주인공으로 등극하시는 임원희 님도 시작과 끝에 등장하셔서 극에 무게감을 더했다.


이렇게 뜨거운 인생을 꾸리는 분들과 함께 가슴 훈훈한 이야기를 만나봤으니, 이제 내가 주연배우가 되어 내 삶을 열정적으로 메울 차례다. 그런데, 오랜만에 이제훈 님이 출연하신 작품을 감상하고 나니, 최근에 추천받고 아직 미처 지 못한 모범택시도 급 궁금해진다.


오늘 밤 10시 본방 사수 전까지,

남은 10시간 내 인생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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