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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Jul 14. 2021

JLPT N2 시험 후기

1년 반만이다. 다시 일본어 시험을 치른 게. 2019년 12월 일본어능력시험(JLPT) N4에 응시했다. 난생처음 치러보는 일본어 시험장에서, 난생처음 받아보는 일본어 시험지도, 답안지도 신기했다. 세상에 꼼꼼대마왕 일본인답게 답안지에 이미 내 이름이 프린팅이 되어 있었다.


작년에 접수했던 N3 시험은 코로나 상황으로 두 번 연거푸 취소됐다. 올해는 작년에 준비 조금 했던 N3 대신에 겁 없이 덜컥 N2에 도전했다. 함께 일본어 시험을 준비하던 블로그 이웃님과 직장 동료분의 영향도 있었는데..


시험이 임박하니 무모한 도전이었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합격 대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시험을 치르는 걸로 목표점을 낮추니 이렇게 준비 안 된 상태로 시험을 치는다는 게 그나마 덜 부끄러웠다.




자리를 확인해보니 제일 앞자리다. 앗싸! 귀가 어두운 내게는 호재다. 청해가 제일 약한 파트인데 조금이라도 더 잘 들을 수 있겠군. 왠지 모를 자신감이 급 뿜어져 나온다.


자리는 내 편이었지만, 날씨는 내 편이 아니었다. 더위를 다지 타지 않는 편이라 긴팔 상의에 카디건까지 준비하고 도톰한 양말까지 신었는데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는 걸 미처 예상치 못했다.


시험 시작 전 창문과 앞뒤 출입문을 활짝 열었지만 더위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잠시 고민 끝에 양말을 벗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좀 나아지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소음에 유독 민감한 이들이 출입문을 계속 닫아버리는 탓에 교실 내 밀집도와 짜증도가 더 높아진 거다.




다행히 시험감독관께서 입실하자마자 에어컨을 가동하신다. 꽤나 소란스럽지만 더위보다는 소음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10여분 에어컨 바람을 쐬니 발목이 시큰거리는 듯하다. 아까 부지런히 벗어둔 양말을 스무드하게 한두 번의 손길로 야무지게 다시 신었다.


첫 시험은 비교적 자신 있는 어휘, 문법, 독해 파트다. 휘리릭 가볍게 한 번 풀고 났는데도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았다. 여유를 만끽하면서 1점짜리 어휘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다시 살폈다. 풀다 보니 문법 문제를 아예 통으로 풀지 않은 파트가  있었다. 덜렁대는 성격을 탓해가며 조심스럽게 풀어갔다.


혹시나 페이지를 제대로 안 넘기고 풀지 않은 문제가 또 있나 살펴보니 세상에나, 또 있다. 나 답지 않다. 이런 초보자 같은 실수는 거의 해본 적이 없는데.. 게다가 초벌 풀이를 할 때 아리송해서 아예 답안 체크를 미뤄둔 것도 몇 개 있다. 초조한 마음에 시계를 확인해 보니 다행히도 아직 꽤나 시간이 남아 있다.




문제를 풀려는 순간 종이 울렸다. 15분쯤 남았겠지라고 생각하고 차분하게 독해 지문을 읽으려 하는데, 안내방송은 불과 5분이 남았다고 알려준다.


현타 시간. 답안지 마킹 전무. 독해 안 푼 걸 풀기엔 시간 역부족. 눈 질끈 감고 안 푼 문제는 그냥 3번으로 다 찍었다. 독해를 버리고 마킹을 시작하는데 손이 살짝 떨린다.


2점짜리 독해를 너무 빨리, 너무 많이 포기해서인지 마킹 끝내고 다 찍고 나서도 시간이 조금 남았다. 독해 지문을 읽고 풀 시간은 안되니 마킹을 좀 더 꼼꼼하게 예쁘게 칠하며 종소리를 기다렸다.


제일 뒷자리에서 답안지를 앞으로 전달하는데 내 줄만 답안지 소식이 없다. 왜  이리 늦나 하고 뒤돌아보니... 내 줄에선 나 혼자 시험을 치렀던 게다.




쉬는 시간에 챙겨간 견과류를 먹으며 보냈다. 시험 전 의지가 충만할 때 들으려고 챙겨간 청해 파일도, 청해 기출문제도 구경도 하기 싫었다. 아, 우리 애들도 시험 망치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어 졌다. 아직 청해 시험은 시작도 안 했는데 빨리 집에 가서 애들을 꼭 안아주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졌다.


청해는 1번 문제부터 낯선 유형이었다. 과락을 넘기는 게 목표였는데 기출을 풀 때도 늘 아슬아슬했기에 큰 기대를 하긴 어려웠다.




시험은 못 봤지만 시험공부했던 시간이 헛되지는 않아 머리 싸매고 공부하는 희열을 다시 경험하고 싶어 졌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일본 뉴스를 자막 없이 듣고 이해하고 싶어 졌다.


시험 다음 날부터 와카메 센세의 고급 뉴스반 수강을 시작했다. 1분 이내 분량이라 부담도 없다. 뉴스 스크립트를 달달 외워버리고 말겠어..라는 굳은 결심은, 그러나, 시험 치른 후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일본어 공부에 대한 열정은, 충격적인 결과표를 받아본 뒤에 되살아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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