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하필 13일의 금요일이다. 불길하다. 태어난 지 서른일곱 해만에 난생처음으로 토플 시험을 치르기로 한 날이 이제 딱 이틀밖에 안 남았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빈속에 커피를 들이켜면서 듣기 공부를 했지만, 며칠 만에 갑자기 실력이 향상되는 기적은 내 차지가 아니었다.
눈물을 머금고, 시험을 연기하기로 했다. 온통 영어로만 도배되어 더욱 부담스러운 토플 웹사이트. 들어가서 연기 버튼을 찾아봤지만,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는다. 토플 준비생들이 자주 방문하는 웹사이트 도움을 받아, 토플 시험 연기는 3일 전까지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예정대로 시험에 응시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5분도 아까운 시기였기에 오가는 시간 15분을 빼도 적어도 40분 남짓이 확보되는 점심시간을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열람실 문 바로 앞자리에 짐을 풀고 라이팅 샘플을 하나 옮겨서 부지런히 암기했다. 토플 공부를 시작한 지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나가던 때였기에 아직 쓰기 파트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다. 기본 템플릿을 만들어 구문을 외우기로 했다. 최근에 한 블로그에서 찾아낸 멋진 문장은 아예 통째로 외웠다.
40분은 금세 지나갔다. 사무실에 들어가며 미처 못 먹은 점심으로 김밥 한 줄을 챙겨갔다. ‘원하는 점수를 받을 때까지는 당분간 이런 생활을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에 한숨부터 나왔다.
토플 공부를 막 시작할 즈음에, 유학 나가는 선배를 우연히 만날 일이 있었다. 일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시험까지 준비할 수 있었는지 묻자,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고시 공부하듯이 하면 돼.”
몸 하나 간신히 누울 수 있는 좁디좁은 공간에서 버텨온 고시생 생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루에 16시간 공부만 하지 않으면 결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던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지 않으면 유학행 티켓을 품에 안을 수 없었다.
퇴근길에 라면으로 대충 저녁을 때우고 집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차피 9시가 조금 넘으면 아이들 전화 때문에 집에 들어가야 하니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다. 스피킹 주제별로 답변 요지를 간략하게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역시나 신당동 칸트 수준인 아들내미는 정확하게 9시가 되자 전화로 언제 오냐며 독촉을 했다. 몇 차례 협상 끝에 25분까지 들어가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른들이 공부를 못하게 구박해도 기어코 몰래 나가 공부했다는 옛 여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놀아달라고 조르지 않는다면 내가 이렇게 분초를 다퉈가며 절박하게 공부에 매달릴지 문득 궁금해졌다.
만만치 않은 회사 업무도 공부에 전념케 하는 데 방해 요소였다. 보통 여름이면 휴가 계획도 짜면서 쉼표를 좀 넣어도 될 텐데. 휴가는 고사하고 지난달처럼 주말 근무를 강행해야 할 판이다. 6월에는 네 번의 주말 중 세 번을 출근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평은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지치고 힘들 때면 지난 2년 반 동안 1,000여 권의 책을 통해 만났던 수많은 비범한 이들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추슬렀다.
평소처럼 새벽에 스터디 버디를 만나 1시간 동안 스터디를 했다. 친구는 정독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생각이라고 했다. 말로만 들었던 도서관을 따라갔다. 도서관에 들어가는 입구에 배너광고가 보였다. 토플 무료 응시를 홍보하는 글에 눈길이 갔다.
무료 응시가 가능한 디지털 자료실에서 회원등록을 하고 읽기와 듣기 시험을 치러봤다. 공부를 거의 못했던 읽기 파트는 다행히 지문이 생각보다 쉬워 시간 안에 무난하게 풀 수 있었다. 듣기는 헤드폰의 힘인지 평소에 스피커로 들었던 것보다 더 잘 들렸다. 읽기를 제외한 모든 파트에 듣기가 다 포함되어 빈약한 듣기 실력 때문에 늘 자신감이 결여되어있었는데, 실낱같은 희망이 꿈틀거렸다.
친구와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말하기와 쓰기를 해봤다. 6주 동안 거의 하루도 안 빼고 새벽마다 만나서 수십 번 연습해본 말하기 파트였지만, 낯선 주제 앞에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문제에 대한 답을 준비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15초. 우왕좌왕하다 보면 어느새 말하기를 시작하라는 신호음이 들리곤 했다.
쓰기는 시간 관계상 해보지도 못하고 비속을 뚫고 인근 카페에서 어휘를 정리하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와 9시 직후에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집에 들어가니 몸도 무겁고 마음은 더 무거웠다. 이렇게 공부도 못한 상태에서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요즘 나의 수면제, 영어 듣기 파일을 복용하며 잠을 청했다. 시험 전날이라 긴장해서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아들과 딸 사이에 엉성한 자세로 자리에 누웠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눈을 떠보니 이미 일요일 새벽이었다.
토플 공부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즐겁고 유익한 측면도 무척이나 많다. 무엇보다도 책을 읽지 못해 늘 허전한 내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읽기, 듣기 지문의 내용이 무척 풍성해 외연을 넓히기에 꽤나 적합하다.
지난주만 해도 잭슨 폴록을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를 만날 수 있었고, 생물, 지구과학 등을 망라한 분야에서 흥미로운 과학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학창 시절에 늘 애를 먹었던 역사, 사회과학 분야의 다채로운 사건들을 만나는 것도 행복하다.
말하기와 쓰기를 준비하면서 다양한 주제에 대해 내 입장과 가치관을 정리할 수 있는 것도 무척 좋다. 물론 심오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해, 표현할 수 있는 정도에 맞춰 생각의 층이 얇아지는 한계는 있지만, 실력을 키우는 만큼 생각의 규모도 도톰해질 테니 이건 큰 문제는 아니다.
토플시험을 준비하는 여정이 힘들지만 즐겁고, 그래서 토플 시험이 은근히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