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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Jan 10. 2021

토플시험 후 등장한 X맨과 번개맨

#1_2012년 7월 15일 일요일 저녁 / 내 인생의 X맨


“유학은 불가능한 일이니 포기하시오.”     


iBT 토플 시험을 치른 후 창원에서 근무 중인 남편과 화상전화를 했다. 여름휴가도 없이 낮에는 일을, 새벽과 주말에는 공부만 해야 하는 상황을 전하자, 열심히 하라는 격려 대신 초를 뿌렸다.      


우리 집 X맨 남편의 반응에 발끈해서 8월 19일 시험에 91점을, 9월까지 100점을 목표로 공부할 테니 주말에 올라오면 적극 협조해달라고 통보했다.     


#2 _2012년 7월 15일 일요일 새벽 / 토플 시험 D-0


평소보다 잠을 좀 더 자야 컨디션이 좋을 것 같아서 5시에 기상을 했다. 계속 마음에 걸려있던 쓰기 실전 문제를 한 세트 풀어봤다. 역시나 듣기가 관건이었다. 주제가 너무 낯설어 간신히 받아 적은 단어 몇 개를 조합해 문장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주제는 단어가 거의 들리고 문장도 대충 이해할 수 있는데,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관련해 깊게 들어가는 글들은 도대체 내용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얼기설기 쓴 다음에 정답을 확인해보니 내 글이 답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단어를 치환하면서 적절한 동의어를 찾지 못해 고민하다 너무 많은 시간을 써서, 검토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였다.       


리스닝도 한 세트 해보고 스터디를 하러 가고 싶었는데 쓰기에서 고전을 면치 못해 시도도 못해보고 스터디 장소로 향했다. 평소처럼 만나 스피킹 한 세트를 풀고 각자 공부를 시작했다. 새벽에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라이팅 구문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3 _2012년 7월 15일 일요일 / 읽기 시험을 치르며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가방을 들고 수험장에 들어갔다가 감독관에게 제지를 당했다. 서약서까지 함께 쓰고 20분 정도 각자 공부를 위해 스터디 친구와 헤어져 독자행동을 했더니 초래된 결과였다.      


토플 첫 응시생의 어설픔은 계속됐다. 전날 워밍업을 해봤다고 한시름 놓았지만 역시 실전은 달랐다. 뭐가 뭔지 몰라 당황해하다 보니 어느새 읽기 파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지문을 아무리 읽어도 해석조차 되지 않았다. 출력물이라면 밑줄이라도 시원하게 그어가며 머리를 쥐어짜 내 보겠는데, iBT라 애꿎은 스크롤바만 이리저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총 42문제, 지문은 3개. 주어진 시간은 60분.      


간신히 혼미한 정신을 수습해 문제를 풀려고 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마이크 볼륨을 조절하는 소리들. 오케이 사인이 날 때까지 "Describe the city you live in"이라는 문장을 되뇌는 수많은 수험생들 사이에서 정신줄을 놓지 않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다 풀고 나서 리뷰를 해보니 앞에서 재빠른 속도로 열심히 찍고, 나중에 심사숙고해 검토까지 한 문제들은 더미에 불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 절망스러웠다.      


#4 _2012년 7월 15일 일요일 / 듣기 시험을 치르며


듣기 파트는 무난했다. 다만 닳아진 연필과 갈수록 빈 면적이 줄어드는 종이를 언제쯤 교체해달라고 해야 할까나 하는 고민이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예정된 파트를 다 마치고 어쨌거나 절반을 해치웠다는 가뿐한 마음으로 일어난 순간, 감독관이 자리로 왔다. 그리고 컨티뉴를 눌러 마저 다 풀라고 주문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당황해하며 자리에 엉거주춤 앉았다. 컨티뉴를 누르니 아~ 놀랍게도 듣기에도 더미가 있었다     


이미 해이해진 정신을 수습해 또다시 문제를 풀었다. 먼저 쉬는 시간 10분을 다 채우고 들어온 수험생들이 여기저기에서 스피킹을 시작해 더 심란했다. 옆자리 수험생도 자리에 앉아 스피킹을 시작했다. 헤드폰 밖으로 'nation'과 'environmentally friendly'라는 단어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5 _2012년 7월 15일 일요일 / 말하기와 쓰기 시험을 치르며


듣기 더미를 대충 찍고 나와서 준비해 간 초쿄 바를 먹으며, 가장 어려운 스피킹 1번과 2번을 중심으로 준비했다. 조금 후에 감독관이 불렀다. 쉬는 시간 10분 동안에는 고사실 안에 입실하지 못한다는 것도 새롭게 알았다. 첫 시험이니 모든 게 새로웠다.     


설레어하며 만난 스피킹 첫 문제. 문제를 두세 번 읽어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질문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고, 아까운 15초를 날리고 횡설수설하다 보니 45초가 이미 지나가버렸다. 예상했던 문제가 아니라 더 황망한 마음이 컸다.     


다행히 2번부터는 무난한 문제들이었다. 중간에 버벅대는 경우도 몇 번 있었지만, 1번처럼 당황해하며 중간에 말이 한참 끊기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쓰기 파트도 무난했다. 질문도 예상했던 것 중의 하나였고, 검토를 충분히 하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답은 써낼 수 있었다.      


#6_2012년 7월 15일 일요일 오후 / 토플 시험장을 나오며


토플 시험장을 나오면서 갑자기 묘한 자신감이 솟았다. 첫 시험이니 참여에 의미를 두기로 하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대략 계산해보니 듣기와 쓰기는 20점 남짓, 잘하면 23~4점까지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말하기는 20점을 살짝 넘길 것 같았다. 완전히 망친 읽기에서 반만 맞아준다면 응시료 지원을 받을 수 있는 83점은 맞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7_2012년 7월 15일 일요일 저녁 / 내 인생의 번개맨


집에 돌아와 큰 딸내미와 이마트에 갔다. 지난봄에 백과사전을 사주면서 20권을 다 읽으면 원하는 것을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딸이 그 미션을 달성한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에 불과한데, 이렇게 결심한 것을 해내는 딸이 참 기특했다.     


이마트에 가는 길에 시험 후기를 상세하게 들려줬다. 나를 헤매게 했던 대목들을 하나하나 짚어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들어주는 딸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했다. 딸에게 구체적인 시험 상황을 묘사하다 보니, 놀랍게도 오늘 시험에 나왔던 문제들이 복기가 되면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이후 한동안 새벽 4시부터 7시까지, 무조건 3시간을 토플에 할애했다. 점심 약속이 없을 때, 야근을 안 해도 되는 날에는 무조건 도서관으로 향했다. 매일 새로운 단어가 포함된 문장을 30개를 암기하고, 듣기 1세트와 쓰기 지문 한 세트를 머리에 담았다. 읽기 파트는 기출 지문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스피킹은 예상 주제 150개에 맞춰 상황별 논리를 2개씩 암기했다.      


새롭게 알게 된 정보를 딸과 나누는 리추얼도 잊지 않았다. 내 인생의 번개맨, 딸 덕분에 나는 9월 시험에서 99점을 맞았다. 원했던 100점까지는 아니었지만, 유학호에 무사히 승선할 수 있었다.     


X맨인 남편이 불 지른 승부욕과 번개맨인 딸의 잔잔한 응원, 모두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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