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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Aug 09. 2021

제발 앉으세요

버스 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길치인 데다 눈썰미가 없어 종종 하차 정류장을 놓치곤 하기 때문이다. 하차 정류장이 두세 개 남으면 이미 초긴장 상태다. 하차벨을 언제쯤 눌러야 하지? 지금쯤? 아, 누가 눌러주는 이 없을까?


일요일 오후, 오랜만에 타게 된 버스. 하지만 탈 때부터 뭔가 제대로 꼬인 느낌이었다. 친구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차가 도착했다. 부랴부랴 이야기를 끊고 차에 올랐다. 교통카드가 결제된 건지 여부가 불확실했다. 기분 좋은 결제음이 내게만 안 들렸던 건지.


자리에 가서 앉으려는데 기사님이 뭐라고 말씀하신다. 귀가 어두운 나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해 다시 기사님 근처로 갔다. 결제가 안됐으니 다시 제대로 하라는 건가?


그런데 근처로 가니 기사님은 벌컥 화를 내신다. 빨리 자리에 가서 앉으란다. 버스 뒤편에 차분히 가서 앉아 창밖 친구에게 손인사를 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엄청 아버린 나는 어정쩡하게 앞자리에 대충 걸터앉았다.




내릴 차례가 가까워지니 마음이 불편해진다. 하차벨을 찾아보니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다시 이동했다. 하차하기 직전에 카드를 꺼내서 리더기에 인식시켰다. 익숙한 그 소리가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제대로 인식시키지 못한 것 같아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서 다시 제대로 카드를 인식시켰다.


제발 앉으세요!


기사님의 고함 수준 샤우팅에 질겁을 한 나는 깜짝 놀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버스 이동 중에 일어나면 안 되나 보다. 언제 룰이 그렇게 바뀐 거지? 가끔 버스를 이용했지만, 그때마다 나를 비롯해 하자를 준비하는 이들은 미리 일어나곤 했다.


이 분, 운행 중 이동 중인 승객으로 인한 사고 경험이 있는 분일까? 내가 그렇게 쓸데없이 많이 움직인 건가? 그럼 하차벨이 멀리 있을 때 그걸 누르기 위해 일어서는 것도 안 되는 건가? 짧은 순간, 내 머릿속은 갖가지 생각으로 분주해졌다.


기사님이 한마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장으로 끝냈다면 이 글을 쓸 생각을 못했을 거다. 이후 폭풍 잔소리가 이어졌다. 처음부터 신경이 쓰였다는 둥. 손님 때문에 힘들다는 둥. 제발 그만 움직이고 자리에 앉아 있으라는 둥.


정확한 단어까지 일일이 다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미 꼼짝 않고 부동자세로 앉아있는데 왜 이렇게 후폭풍 신경질을 다 감내하고 있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욱하는 성마른 성격이 아직도 남아 있는 나는, 참을 인자를 가슴에 새기면서 나를 다독였다. 절대 대꾸하지 마!




이 경험 후 세 가지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우리나라 버스 운행 문화가 꽤 선진화되었구나'라는 거였다. 버스를 자주 타던 시절 나는 때맞춰 하차벨을 누르지 못하면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했다. 기사님을 불러도 이미 늦었다며 휙 가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하차벨을 눌러도 기사님이 깜박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예전 시절과 비교하면 운행 중 이동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미리 하차벨을 누르지 않아도 정류소에 도착하면 문을 열어줄 테니 벨을 누를 필요가 없다는 거겠지? 어쨌거나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가치는 쌍수 환영이다.


다음으로 들었던 생각은 나이를 불문하고 꼰대가 될 수 있다는 거였다. 그 기사님은 꽤 젊었다. 외모로만 보면 30대 초반 정도. 목소리도 젊었다. 그럼에도 그분의 언행은 우리가 잔소리의 대명사로 인식하는 연세 지긋한 어르신 못지않았다. 쌍욕을 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거칠었고 쓸데없이 길었다.


'앉으세요, 갑자기 일어나셔서 놀랐습니다'라는 한마디였으면 나는 기사님께 매우 미안한 마음을 갖고 차에서 내렸을 거다. 하지만 이어지는 잔소리에 반감이 커져갔다. 원인 제공은 내가 한 게 분명했음에도 말이다.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안기는 말을 하게 될 때는 최대한 짧게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생각은 이제 나는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루저인가..라는 자괴감이었다. 교통카드 하나 제대로 인식시키지 못하고 이런 해프닝을 초래하다니. 갑자기 키오스크 앞에서 헤매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연세 드신 분들이 기차 온라인 예매를 하지 못해 입석을 이용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4년 후면 초고령사회다. 물론 65세 그룹에 편입되려면 아직 내게 주어진 시간은 제법 된다. 그럼에도 이 오싹한 기분은 뭘까?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디지털 문맹자처럼 겉도는 생경한 이 느낌.


그런데 어제 사용했던 카드,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니 교통카드 기능이 없는 것 같다. 나, 무임승차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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