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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Aug 19. 2021

정리의 여신?

整理

네이버 국어사전에 의하면 정리란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다. 정리는 내가 가장 취약한 지점 중 하나다. 가지런하게 다스리는 게 왜 그렇게 쉽지가 않을까?


어렸을 때, 무조건 모으는 아버지와 필요가 없는 물품은 버리려는 어머니 사이 갈등을 가끔 목도하곤 했다. 모으겠다는 의지만 있을 뿐 정작 어디에 어떻게 쌓아두겠다는 구체적인 실천전략이 부족했던 아버지보다, 둘 곳이 없다고 명백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어머니 목소리가 더 호소력이 있었기에 10년 가까이 보관해놓은 내 유치원복과 초등학교 때 잘라놓은 머리카락은 몇 년 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왜 아버지는 이렇게 물건을 모으셨던 것일까? 자식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남달랐던 아버지는 자식이 장성해 유명해지면 박물관을 위한 물품이 필요하다며 혹시 모르는 '0.0001%'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셨다.




지금 내 모습은? 정리라는 단어와는 담쌓고 살다 사회인이 되었고, 가정을 꾸린 후에도 사정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정리정돈과 친하지 않은 일상은 늘 아슬아슬하다.


책상을 잘 치우지 못해 보안점검이 있을 때마다 단골로 걸려 명절 일직을 서곤 했더랬다. 요즘에는 당직 정도가 아니라 징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불시점검에 대비해서 서류는 꼭꼭 잘 감춰두고 퇴근한다. 다음날 출근해 전 날 숨겨둔 서류들을 다시 찾는 게 일이긴 하지만.


서류뿐 아니라 파일 정리도 재능 없기는 마찬가지다. 급하게 업무를 처리할 때는 폴더별로 파일을 저장하는 시간도 아까워 바탕화면에 버전별 파일을 저장하기 일쑤다. 이렇게 대충 저장해둔 파일들이 현안 처리가 끝난 후에라도 제 자리를 찾아가면 다행이겠지만, 그런 기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보통은 '21년 8월 바탕화면_정리필요'처럼 성의 없는 폴더를 만든 후에, 그 안에 대충 구겨 넣었다 인사이동 직전에 부랴부랴 정리하곤 한다.




주변 물품들이 제 자리에 놓여 있지 않으니 찾느라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정작 찾아도 내 기억 속 예전 모습이 아닌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내 모습을 수시로 반성하고 가끔은 정리의 달인을 향한 노력도 기울여봤다.


10여 년 전에는, 캐런 킹스턴의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이라는 책을 읽고 정신이 번쩍 들어 집과 사무실 정리를 부지런히 했다. 4년 전에는,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를 읽고 집안 물품을 매일매일 정리하곤 했다. 작년에도 정리의 여신 곤도 마리에의 책과 영상을 본 후에 한동안 정리의 달인 흉내를 내봤다.


하지만 천성이 워낙 정리와는 거리감이 있는지라, 원점으로 회귀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매일 출근하면서 '오늘은 꼭 정리를 하고 말겠어!'라고 다짐하지만, 퇴근할 무렵에 더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서랍과 캐비닛을 애써 외면한다. 금요일에 퇴근할 때면 '주말에 꼭 나와서 사무실 정리를 하겠어!'라고 마음 먹지만, 일요일 저녁에 불편한 마음을 애써 짓누르고 월요일을 맞이한다.




눈 질끈 감고 버텨온 지 두어 달 만에 서랍과 캐비닛은 포화상태가 되었다. 도끼날 갈 시간이 없다고 무딘 도끼로 나무를 찍어대는 어리석은 나무꾼 모습과 결별할 때라고 강하게 세뇌했다. 마침 급하게 밀어닥치던 업무를 1차로 마무리짓고, 30여분 정도 시간 여유가 잠깐 생겼다.


 물건들에게 코칭을 하는 식으로 정리해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가위야, 네가 있을 곳은 어디지?'라고 물어가면서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정하고, 그곳에 두라는 거다. 문제는 두 가지다. 일단 일일이 물어보면서 집을 찾아주기엔 내 종이 파일들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내 종이 파일들이 속할 집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이 각도에서 보면 이 집이 맞는 것 같고, 저 각도에서 보면 저 집이 맞는 것 같아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한 대로 일단 1차 정리를 마쳤다. 물론 30분 안에 정리하는 거라 불필요한 서류를 파쇄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정리해야 하는 서류의 양이 급감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체계적인 정리가 부재한 상태에서는 일도, 일상생활도 쉽사리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미니멀리즘을 표방하게 되면서 물건을 살 때마다 새롭게 들이는 항목만큼 과감하게 버리기 시작하면서 집안 정리는 아주아주 살짝 나아진 듯싶다.


물론 사무실은 여전히 난공불락이다. 그럼에도, 찜찜한 기분 느끼지 않고 매일 쿨하게 퇴근하는 그날까지, 정리 여신으로 등극하는 그날까지, 정린이(정리 어린이)의 도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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