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가장 좋아하던 과목 중 하나는 미술이었다. 시간표에 미술이 있으면 그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심지어 이론수업도 좋았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서일까. 두 딸이 그림을 그리는 게 좋다. 그림을 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취미생활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기쁘다.
그림을 좋아하지만 정작 그림을 보러 다닌 적은 그렇게 많지 않다. 최근에 기억나는 건 3년 전 늦가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재작년 봄, 친구와 함께했던 일본 다카마쓰 여행 중 지추미술관. 재작년 초가을, 직장 동아리 선생님의 개인미술전을 구경해본 게 전부다. 작년 말, 큰아이 입시 면접에 함께 하면서 졸업전 본 것을 포함시켜봐도 손 하나로 충분할 정도다. 평균 1년에 한 번 꼴이다.
회사 동료께서 인근에 있는 현대미술관을 추천해주셨다. 작년 큰아이 입시를 준비하면서 동서양 유명 작가들의 주요 작품과 해설을 함께 공부한 적이 있다. 상대적으로 꽤 생소했던 현대 미술작가들을 그때 몇 만나볼 수 있었다. 그래도 현대미술은 여전히 다른 시대에 비해 이해하기가 난해하다는 선입관이 있다.
일주일 후면 기숙사에 입소해야 해서 둥지를 떠나는 대학생 큰 딸과 방학이 끝나기 전에 추억을 하나 쌓고 싶어서 현대 미술관행을 결심했다. 거리두기 단계를 감안해 하루에 네 차례, 시간대별로 100명만 사전예약을 받고 있었다. 라이드를 해주는 남편도 합류하겠다고 해서 요즘 자주 만나는 친구까지 네 명을 예약했다.
미술관은 총 5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수장고에 있는 것을 중심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들도 꽤 많았다. 1층 수장고에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채 있는 작품들을 보다 보니 역시 대한민국이란 생각이 들었다. 5년 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엉망진창인 상태로 박물관에 아무렇게나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 작품들은 꽤나 질서 정연했다.
시대별로, 주제별로, 소재별로 전시된 작품들을 차분히 감상하다 보니 시간이 제법 흘러갔다. 그냥 넘어가던 작품도 <백남준>, <박수근>, <이중섭> 작가님처럼 익히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란 걸 알게 되면 발걸음을 돌려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게 됐다.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만큼 심미안과 안목이 높지 않으니, 작가 유명세에 기대서 함의를 찾았던 거다.
맨 꼭대기 층인 5층에서는 기획전이 진행 중이었다. <미술원, 우리와 우리 사이 Art(ificial) Garden, The Border Between Us)>이라는 제하부터 흥미로웠다. 미술관이 아니라 미술원이라니. 반려견으로 키우는 동물들 그림과 사진, 설치미술 작품들로 시작해서 동물원 우리에서 갇혀 사는 동물들. 식용으로 잔인하게 도살당하는 동물들까지. 우리와 동물의 관계와 사이에 대해서 짚어놓은 층이었다.
도살장 동물 울부짖음에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쫓기듯이 층을 빠져나왔다. 미술관으로 출발하기 전, 삼겹 부위를 통째로 들고 있는 백종원 씨 사진을 우연히 봤는데, 잔상이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시도하고 있다는 요조 작가님을 따라서 식생활 변화를 도모해볼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게 만든 층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3층에 있었다. 눈길을 가장 사로잡았던 작품은 이쾌대 작가님의 <인체의 해부학적 도해서>와 <부인의 초상>이었다. 김정욱 작가님의 <병원의 사생활>을 통해 그림 그리는 의사에 대해 관심이 커졌더랬다. 물론 이 작가님은 의사는 아니었지만 화가의 시선에서 접근한 해부학서가 흥미로웠다. e북으로 책장을 직접 넘겨볼 수 있어서 더 기억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이 작가님에 대해 좀 더 찾아보다 야구선수로 유명한 휘문고보 유격수로 활약했다는 이 작가님의 자화상을 보게 됐다. <부인의 초상> 작품 속 아내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는데, 이 작가님 또한 다부진 체격에 훤칠한 미남형이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에서 일까, 선남선녀의 조합은 언제나 옳다고 느껴진다.
함께 관람했던 친구가 딸아이 대학이 있는 곳 시립미술관과 함께 인근 이응노미술관도 추천해줬다. 백신 두 차례 모두 맞고, 하반기에 준비 중인 두 번의 시험 모두 잘 치른 후에, 올해 안에 꼭 가볼 계획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좀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겠지? 그동안 미술 관련 책 읽고 남긴 포스팅 리뷰하면서 내공 좀 쌓아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