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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Aug 24. 2021

프로 어취버

자타공인 계획 수립 장인이다. 어렸을 적부터 쭉 그래 왔다. 처음 세웠던 계획이 언제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렴풋한 기억 한 모퉁이를 뒤져보니 약 열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습지 목차 옆에 연필로, 볼펜으로, 색연필로 수많은 날짜를 적곤 했다. 초등학교 때는 ‘완전학습’이라는 학습지가 인기였다. 지금처럼 사교육 시장이 발달한 것도 아니라서 학원을 다녀본 기억이 거의 없다. 당시에 남들은 다 다니는 주산학원, 피아노 학원도 다녀보지 못했다. 완전학습이라는 꽤 괜찮은 타이틀이 붙여진 학습지가 공교육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주는 유일한 선생님이었다.


학습지를 산 후 맨 처음에 하는 일은 목차 옆에 정성스럽게 날짜를 적는 것이었다. 매 학기 초는 공부를 하겠다는 의욕에 충만해 있는 때라 쉬는 날도 없이 날짜가 이어졌다. 기분이 좋을 때는 하루에 다 풀기에는 버거워 보이는 분량을 묶어서 단 하루에 집어넣어 버리는 만용을 부리기도 했다.


이런 계획 세우기 첫 작업은 항상 연필로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도 이 계획이 그대로 지켜지기에는 무리라는 걸 감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무리한 계획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검은색 모나미 볼펜을 빼들고 날짜 조정에 나섰다. 두 번째 계획 세우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점진적으로 계획을 미세 수정하다 보면 한 학기가 금세 지나갔다. 학습지를 다 풀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성과까지 관리할만한 뒷심은 부족했던 까닭이다.




이런 기특한 계획 세우기 습관은 해를 거듭하면서 점점 더 모양새를 갖추어 나갔다. 하지만 학창 시절의 계획표는 아직 미숙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미 만들어진 목차 옆에 달력에 있는 숫자를 그대로 옮겨 적는 수준에 그쳤던 것이다. 숫자를 적어야 하는 문제집이 좀 더 다양해졌다는 것이 발전한 점이라고나 할까.


고등학생이 되면서 조금 더 나아졌다. 아예 새로운 종이에 틀이 잡힌 그럴듯한 계획표를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문제집을 주춧돌 삼아 수동적으로 계획을 세우던 방식을 조금 탈피하게 된 것도 나름 성과다. 예전 사람들은 영어사전을 한 장씩 찢어서 외우고 다 암기하면 먹어버리곤 했다는 전설을 들은 후, ‘사전 암기 프로젝트’를 스스로 가동하기도 했다. 사전에 별이 붙어 있는 단어를 공책에 정리해서 외워버리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더랬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시작한 이 거대 프로젝트는, 알파벳 A를 간신히 넘기는데 만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었고 N 언저리에서 중도 하차하고 말았다. 알파벳을 옮겨 적는 것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나면 정작 암기를 위한 시간과 열정을 내기가 어려웠다. 결국 단어 암기는 뒷전이고 볼펜 자국으로 점점 볼록해지는 노트를 보는 만족감으로 대체했다. 하교하는 스쿨버스에서 기진맥진해서 자는 것이 일상이 되곤 했지만, 열정적으로 보낸 하루와 맞바꾼 대가라고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대학 졸업을 한 해 앞두고 취업준비용 공부를 시작할 때 10여 년 이상 갈고닦아 온 계획 수립 스킬이 제대로 빛을 발했다. 생소하기 짝이 없던 낯선 과목들, 행정법, 헌법, 행정학, 경제학, 교육학 등. 문학 전공자인 내게는 터무니없이 높은 진입장벽이었다. 예전보다 난이도 높은 촘촘한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시험날짜를 디데이로 잡고 남은 시간을 역으로 계산한 다음 날마다 공부해야 할 분량과 시간대별로 공부할 과목을 정리했다.


오답노트도 꼬박꼬박 정리했다. 10대 때 적는 것 그 자체로 희열을 맛봤던 전두엽이 20대 때도 꾸역꾸역 적도록 인도했다. 함께 취업준비를 하던 과 톱이었던 친구는 나를 통해 오답노트를 통해 실력을 쌓는 방법을 배웠다며 만날 때마다 고마워했다. 머릿속에 넣는 것보다 손이 늘 더 빠르고 부지런했던 탓에 2~3년으로 예상했던 취준시기는 만 4년이 지나서야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어제 JLPT N2 결과 발표가 났다. 독해에서 실수를 했지만 기대보다 고득점을 했다. 믿었던 언어 지식 점수가 의외로 낮았지만, 과락을 우려했던 청해는 예상외로 선전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꽤나 괜찮은 점수로 N2를 합격하고 나니 일어 공부 계획을 세우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불어 시험 직후라 부담스럽고 N1은 정말 정말 어렵다고 해서 무리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동안 두 달여 가까이 일어는 잊고 불어에 애정을 쏟던 참이었다. 목표 없이 하는 공부는 방향을 잃을 수 있기에, 향후 커리어에 <파리에서 일해보기>를 추가했다. 호기롭게 아이들에게 "2024년 올림픽은 파리에 가서 보자!"며 제안했다. 막내딸은 "2021년 도쿄올림픽 단 한 프로도 TV에서 안 봤으면서 무슨 파리예요?"라며 날 서게 대꾸했다. 팩폭이 자명하다. 나는 스포츠를 즐기지 않는다. "거짓말하지 마요. 올림픽 관람권이 얼마나 비싼 줄 알고 하는 얘기예요?"라며 아들도 일갈했다.




아이들이 거세게 반대하니 더 도전하고 싶어졌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집안의 반대가 그리 거세지 않았다면 조금 썸만 타다 끝냈을지도 모른다. 내게 금지와 금단이라는 단어는 욕망과 열망의 유의어다. 일어와 고강도 거리두기도 바로 풀었다. N2 합격까지 이끌어 준 다락원 책도 바로 주문했고, N1을 홀로 공부하기는 벅찰 듯싶어 온라인 패키지 강좌도 눈 질끈 감고 결제했다.


불어 시험은 88일 남았고, 불어 시험 2주 후 일어시험이다. 정작 공부할 때는 지루하고 힘들지만, 새 책을 받아 들고 공부계획을 세울 때는 늘 가슴이 콩닥거린다. 이런 나를 어떻게 호칭하면 좋을지 큰 딸에게 물어봤다. "Pro-Achiever 어때요?" 오홋, 딱 맘에 든다.


아드레날린, 세로토닌, 옥시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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