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큰 딸과 <히든 피겨스>를 봤다. 기숙사로 보내 독립시킨 큰 딸을 불과 4일 만에 보는 건데도 애틋한 마음에 주말 독서실행을 포기하고 딸 옆을 지키다 다시 떠나보내기 전에 기억에 남을 만한 걸 함께 하기로 한 후, 선택한 영화였다.
영어실력을 맹신해 자막 없이 보다 10여분 쯤 후 판단 착오라는 걸 깨달았다. 해석 기하학을 비롯해 온갖 전문 수학용어가 등장해 도저히 자막 없이는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자막이 등장하니 편안함도, 감동도 더 커졌다.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는 영화 포스터 표어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담대한 꿈을 꾸고,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만들어낸 여성 서사에 관심이 많다. 사회로 나가기 전,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 딸에게도 의미가 큰 영화가 되었다. 자기 계발 욕구를 자연스럽게 싹 틔우는 이 영화에 감동한 건, 무려 9.37점이라는 평점이 말해주듯, 우리뿐이 아니었다.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제대로 자존심을 구긴 미국은 유인 우주탐사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이 거대한 플랜에 동참하게 된 흑인 여성 세 명, 캐서린, 도로시, 메리. 수학천재 캐서린은 12세에 이미 대학에 진학해 NASA에 합류하고, 카리스마 쩌는 도로시는 NASA 유색인종 전산원 팀을 진두지휘한다. 매사에 호기심 넘치는 매력뿜뿜 메리는 NASA 최초 여성 엔지니어를 꿈꾼다.
타고난 영민함과 지독한 열정과 끈기를 바탕으로 캐서린은 그 많은 천재들도 해결하지 못하는 위성의 각종 궤도 계산도 척척 해내고, 만능이라 여겨졌던 IBM의 연산 오류까지 잡아내는 독보적인 존재다. 남편과 사별 후 홀로 세 아이를 키우며 일도 당차게 해내던 그녀 앞에 새로운 인연이 나타나지만 여성비하성 발언에 실망해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오히려 이 모습에 더욱 매료된 그의 정성스러운 애정공세에 함께 하게 된 인연은 52년 이상 지속되고 그녀는 일에서도, 가정에서도 진정한 성공을 거머쥔다.
캐서린 뿐 아니라 여성과 유색인종이라는 이중의 벽을 기필코 넘어서겠다는 세 주인공의 다부진 포부와 결연한 의지가 화면 밖으로 느껴져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들과 함께 웅장함과 비범함을 경험했다. IBM 컴퓨터 등장에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사보타주 대신 도로시가 택한 선택은 얼리 어답터가 되는 거였다. 포트란 사용법 책을 입수해 독학한 후, 자신의 지혜를 전산원 팀들과 나눠 튕겨지는 대신,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필수 관문에 얽힌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메리의 선택은 법에 호소하는 거였다. 명예욕을 갈망하는 판사의 욕구를 건드려 흑인 입학을 불허하는 학교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최초의 판사가 된다면, 자신은 NASA 여성 최초 엔지니어가 될 거기 때문에 판결을 내린 판사 또한 역사에 이름이 영원히 기록될 거라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하는 과목 중 하나는 수학이었지만, 대학 이후 산수 이상을 접해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보니 산식을 봐도 이제 집중이 어렵다. 그럼에도 소수를 사랑한다. 소수를 처음 배운 후 소수가 너무 좋아서 중학교 때 키 순으로 번호를 받을 때 소수 번호를 받고 싶어서 37번 자리에 가서 섰다. 1학년 2학년 때는 다행스럽게 키가 큰 편이라 37번 번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중 3이 돼서는 성장이 멈춰버려 23번 소수에 만족해야 했다. 22번이 나보다 더 컸지만, 난 소수 번호를 받아야 하니 과자와 맞바꿔 23번 번호를 꿰찼다.
미드 빅뱅이론 주인공 쉘든이 사랑하는 숫자는 소수 73이다. 73은 21번째 소수고 73을 뒤집은 37은 12번째 소수다. 12를 뒤집은 수인 21은 7과 3의 곱이다. 73이라는 숫자 실타래 여정에 흠뻑 빠진 쉘든 역을 맡은 짐 파슨스는 <히든 피겨스>에서도 등장한다. 시샘 많은 수석 엔지니어 폴이라는 이름으로. 복잡한 과학이론을 로봇처럼 읊어대던 쉘든의 모습이 낯익어 폴이라는 엔지니어 역할도 제법 어울렸다.
어려운 수학을 공부할 의지도, 필요도 없지만, 모처럼 수학 마인드로 중무장한 영화로 체화됐으니 오늘 밤 자기 전 마방진 하나 정도 해볼까 싶다.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안 마방진은 1부터 16까지 숫자 중 10과 14는 중복해서 예수 승천 당시 나이인 33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25년 전 방문했을 땐 이런 걸 전혀 몰라 가우디 흔적만 좇느라 바빴더랬다. 배우고 익힐 게 많아 몸은 바쁘지만 마음은 충만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