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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Sep 15. 2021

오우버컴

엄마, 누나한테 얘기했어?


친정부모님 욕실 수도꼭지를 전면 교체했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던 남동생이 슬쩍 엄마께 묻는다. 호들갑스럽게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나니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누나, 큰방에 있는 자전거 타봤어?


부모님 건강을 각별히 챙기는 동생이 피트니스 바이크를 부모님께 선물한 거다. 바로 큰 방에 가서 페달을 몇 번 돌려봤다. 바이크 계기판에 놓인 단어장에 눈길이 간다. 손바닥만 한 단어장이고 한 페이지에 딱 한 단어만 적혀 있다.


마침 펼쳐진 페이지에 적힌 단어는 "overcome." 영어 단어 아래에 한글 발음과 뜻이 적혀 있다. "오우버컴 극복하다" 엄마 글씨체가 틀림없다. 다리를 굴리며 신체 운동하는 순간에 뇌 운동도 함께 하겠다는 엄마의 결연한 의지가 고스란히 엿보인다.


외워지지 않지만 친정 가는 차 안에서 일본어 단어장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내 모습이 오버랩됐다. 나 역시 운동할 때 종종 단어장을 들고 간다. 내 DNA는 뼛속 깊숙이 엄마를 닮았다.


내가 무시하는 건 자신은 노력도 안 하면서
열심히 사는 사람을 무시하는 거야


그제 백신 접종을 맞은 후 무리하면 안 된다는 조언을 따라 오후에 휴가를 내고 쉬었다. 외국어 공부는 '무리'의 범주에 포함될 것 같아 가볍게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고르다 눈에 띈 영화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사다.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는 여주 션자이가 허세에 찌들어 노력하지 않으면서 범생이를 평가절하하는 남주 커징턴에게 날린 일침이다. 공부 안 해서 자신보다 더 멍청한 커징턴을 무시하고 싶지 않아서, 애써서 커징턴을 공부시키는 션자이.


션자이에게 핑크빛 감정을 느끼며 공부 투지를 불태우는 커징턴.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의 인연은 아쉽게 마무리를 하게 된다. 첫사랑은 맺어지지 않을 때 더 아련한 색채로 남겨지는 듯싶다.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 더 실감나게 다가왔다.


친정엄마는 노력파 상위 1%에 들 거라 확신한다.

나는 1%까지는 못되더라도 10%에는 들지 않을까 자부심을 가져본다. 노력파를 극성스럽다는 단어로 폄하하는 주위 발언에 가끔 위축되기도 했던지라 션자이의 대사가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던 듯싶다.


노력파 엄마의 성장기를 입증하는 성과 중 하나는 학교 문턱도 못밟아본 엄마가 고등학교까지 검정고시와 야학 등 도움을 받아 마치셨다는 거다. 우리 엄마만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대한민국에 대단한 엄마들이 많이 계셨다.


전국 문해교실에서 배움의 기쁨을 알게 되신 분들의 시를 엮은 <다시 만난 봄>이란 책을 어제 받았다. 딸이라고 학교에 가지 못하고 살림하고 농사일하며 온갖 고난을 '오우버컴'해야 했던 많은 엄마들은, 이제 문해자의 반열에 올라 자신의 감정을 글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글 읽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축복을 큰 어려움 없이 누릴 수 있었던 나는 다른 종류의 시련을 만났다. 이 난관을 '오우버컴'한 후에 어떤 길이 내 앞에 펼쳐질까? 기대 반, 설렘 반으로 가득 찬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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