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전업주부로 탈바꿈한 지 만 5년 차다. 남편은 친정집 마당에서 아빠와 함께 집으로 가져갈 실한 양파를 고르고 있다. 이미 집에 양파가 한 박스나 있는데도 더 필요하냐고 묻자 두고두고 먹으면 된다며 빙그레 웃는다. 살림꾼 모습이 완연하다.
남동생은 아들 셋을 전담해 키워보고 싶다며 1년간 육아휴직을 했다. 아침식사 당번을 비롯해 아이들 챙기는 것들을 도맡아 한다고 했다. 올케는 '육아휴직'이 아닌 '유아 휴식'이라고 말하지만 올케 얼굴에 만연한 함박웃음이 말해주듯 살림 도우며 집에 있는 남편이 싫지 않은 눈치다.
얼마 전에 본 일본 영화 <내일의 기억>에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중년 남성이 등장한다. 한참 젊고 건강할 때 가정을 도외시하고 회사에 헌신하지만, 건강을 잃자 회사는 냉정하게 그를 내친다. 뒤늦게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추억을 켜켜이 쌓아두고 싶어 하지만, 야속하게도 세월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결코 잊고 싶지 않았던 사랑하는 아내마저 잊어버리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행복의 비결은 멀리 있지 않다. 무려 75년에 걸쳐 장기 종단연구를 수행한 하버드대 연구결과에 따르면 행복하게 사는 이들의 공통분모는 딱 하나, '관계(relationship)'였다. 나를 지지해주는 우호적인 그룹과 얼마나 친밀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해 유지하고 있는지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
MBTI는 ENFJ임에도 외향 51%, 내향 49%인 나는 주기적으로 만나는 4명 이상 되는 그룹 모임이 전혀 없다. 원래도 한 두명만 만나는 걸 선호하는 성향인지라 강한 거리두기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내 관계망은 건재하다. 게다가 내 삶 자체에 애정이 깊어 자주 만나는 친구 모임도 매우 제한적이다.
이런 내게 가장 소중하고 친밀한 멤버는 역시 가족이다. 추후 아이들이 독립해 그들만의 가정을 꾸린다면 우선순위가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세 아이가 가장 친한 친구다. 다음으로 남편과 친정부모님, 남동생이 떠오른다. 언제 내가 행복한 지를 블로그에 기록하곤 한다. 11년 전, 2년 전, 그리고 오늘 기록한행복한 순간 속에서, 가족은 변함없이 등장한다.
2010.11.23 나는 이럴 때 행복을 느낀다
1. 잠에서 부스스 깬 얼굴로
살며시 미소 짓는 세 아이들 얼굴에 뽀뽀할 때
2. 새벽에 알람 울리기 전에 눈뜬 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책을 펴들 때
3. 통화 중 차분해지면서 안정을 되찾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때
4. 조카 휠체어를 끌던 동생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웃음 지을 때
5. 미사 보면서 기도문을 신나는 노래로 부를 때
6. 서가에 잔뜩 꽂힌 책 중에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발견했을 때
7. 지하철 타러 가면서 열심히 영어문장 외울 때
8. 거울 앞에서 발표 연습할 때
9. 사람들 앞에서 준비한 원고를
막힘없이 잘 표현했을 때
10. 내가 올린 글에 대한 반응을 느낄 때
11. 업무로 인해 알게 된 이들과
영혼의 교감이 느껴질 때
12. 퇴근할 때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모습이
썩 만족스러울 때
13. 딸내미와 주님의 기도를
크게 노래 부르면서 출근할 때
14. 올케가 내가 준비한 먹거리를 맛있게 먹고
웃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
15. 어머니께서 활짝 웃으면서
막내의 새로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실 때
16. 영어가 술술 들릴 때
17. 내가 본받고 싶은 괜찮은 이들을 만날 때
18. 트레이드 밀에서 30분을 보낸 후 체중 잴 때
19. 업무보고서 글 채울 때
20. 새롭게 알게 된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눌 때
21. 아이들과 함께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출 때
22. 맘 맞는 이들과 즐겁게 이야기 나눌 때
23. 콩다방 진한 카페라떼 마실 때
24.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면서 뭔가에 집중할 때
25. 남편이 '고마워'라고 말할 때
26. 아이들이 '엄마가 최고'라고 말할 때
27. 지인들이 내 열정을 인정해 줄 때
28. 기도하면서 내 자신이
선해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
29. 새 옷을 입고 출근할 때
30. 오랫동안 연락 뜸했던 지인들과 통화할 때
2019.11.23 나는 이럴 때 행복을 느낀다
1. 새로운 정보와 사실을 책, 사람,
직간접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을 때
2. 가족 모두 꿈나라인 이른 아침에 일어나
홀로 좋아하는 새벽 활동을 할 때
3. 마음 맞는 이와 맛있는 식사나 차 함께 하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때
4. 외국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중에
문장이나 단어가 귀에 쏙쏙 들어올 때
5. 야식 꾹 참고 부지런히 운동한 후에
설레는 기분으로 체중계 숫자 확인할 때
6. 내 호의에 고마워하는 분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줄 때
7. 힘들다고 불평할 겨를도 없이 몰입해서
의미 있는 일을 할 때
8. 뜨겁게 사는 이들의 삶을 통해
신선한 자극을 받을 때
9. 스케치북 위에 연필선을 쌓아가며
그림을 조금씩 완성시킬 때
10.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맛있는 음식 나누며 흥미로운 주제를 매개로 이야기를 풀어갈 때
2021.9.16 나는 이럴 때 행복을 느낀다
1.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거나 보드게임을 할 때
2. 좋아하는 책이나 웹툰을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홀로 읽을 때
3. 큰 딸과 일상을 나누거나 함께 공부할 때
4. 아들이 최근에 즐기는 음악과 책 이야기를 들려줄 때
5. 막내딸이 뭉친 어깨를 파워 안마로 시원하게 풀어줄 때
6. 맘 맞는 동료들과 식사하며 이야기꽃 피울 때
7. 회사에서 상사나 동료들의 인정을 받을 때
8. 낯선 분야를 부지런히 탐구해
업무 장악력이 제고되는 게 느껴질 때
9. 글을 매개로 온라인 친구들과 소통할 때
10. 남편이 출근 응원 뽀뽀해주고
퇴근 후 고생했다며 엉덩이 툭툭 해줄 때
Good relationships keep us happier and healthier. Period.
어제 막내딸 생일을 맞아 큰 딸이 집에 왔다. 다섯 가족이 모두 모이는 시간을 기다리다 보니 밤 10시가 넘어서야 생일파티를 할 수 있었다. 생파 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어제 쉐도잉한 TED Talk 이야기를 들려줬다. 75년 하버드 종단연구의 4번째 연구책임자인 Robert Waldinger가 <What makes a good life?>란 제하로 풀어간 스토리였다.
놀랍게도 딸도 어제 이 영상을 들으며 공부했다고 했다. 기억나는 톡의 문장을 동시에 읊었는데, 감동한 대목마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