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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Oct 30. 2021

나름 인싸였어?

우리 집 다섯 명 가족 중 XY 염색체 보유자는 두 명이다. 둘 다 내향의 극치를 달린다. 퇴직 후 남편이 친구를 만나는 걸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들도 맘 터놓는 친구가 없다. 남편과 아들이 서로에게 절친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싸. 아웃사이더라는 단어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우리 집 남자들. 오늘은 나름 인싸로 등극했다.




대한민국 40만 명이 응시했다는 공인중개사 시험. 남편도 오늘 응시했다. 책만 사두고 거의 공부를 안 하기에 기대를 안 했는데, 이번 주 일주일은 나름 열공을 하더니 1차 두 과목 모두 80점대를 맞은 듯하다. 정확한 점수는 공개하지 않고 그저 환한 웃음으로 점수 힌트만을 줄 뿐이다. 혹시라도 마킹 실수라도 해서 점수가 내려갈까 싶어 신중모드인 듯하다.


공부를 거의 안 했던 2차 세 과목 중 한 과목은 과락을 넘겼다며 내년 시험 합격에 자신감을 선보였다. 워낙 소셜 스킬이 약한 이라 부동산 개업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아이들 집 구할 때 좀 더 괜찮은 집을 고를만한 안목을 갖추는데 이번 시험이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5년 전 퇴직하기 전 남편은 공직에 있었다. 퇴직 후 잠시 방황하다 7급 시험을 준비해보겠다며 온갖 책을 종류별로 다 구입했다. 조금 공부해보더니 너무 어렵다고 포기했다. 이후 9급 시험용 책을 구입하기 시작했지만,  좀 살펴보더니 이것도 어렵다며 두 손 들었다.


법조인으로 일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변호사도 등록했지만, 레드 오션 시장에서 승부수를 띄우는 것에 대해 내내 조심스러워했다. 결국 사건은 단 한 건도 수임하지 않고 변호사 회비만 줄곧 내다 얼마 전부터는 그것도 중단한 듯하다.




이후 남편은 50년 가까이 거의 경험해보지 못했던 블루 칼라 영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멘트 회사에서 수개월 일하다 산업재해에 버금가는 손목 부상으로 중단했다. 산업재해로 치료비를 청구하라는 내 주장은 묵살됐고, 병원도 거의 안 다니고 홀로 이리저리 알아보더니 결국 재활에 성공했다. 이후 지게차, 승강기, 자동차 정비, 전기기능사, 제과제빵 등 참 다양한 분야 자격증을 따기 위해 노력했다.


'갯마을 차차차'라는 드라마에는 각종 자격증을 섭렵한 홍반장이 등장한다. 우리 집에는 우리 남편이 그런 홍반장과 같은 존재다. 동생에게 받은 10년도 더 된 구형 소나타. 뒤쪽 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데, 며칠 전에는 스무드하게 잘 작동됐다. 남편이 으쓱해하며 말한다. 본인이 고쳤다고.


막내딸 아이패드가 고장 났을 때도 홀로 이리저리 알아보더니 액정만 직구해서 남편이 직접 교체했다. 물론 전문기술가만큼의 손길에는 미치지 못한다. 막내는 어제도 그림 그리다가 펜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다며 왕창 짜증을 냈으니.




아들은 한국에서만 오늘 59만 명이 시청 중인 롤드컵(롤 국제대회)에서 나름 존재감을 선보였다. 코인을 전부 걸었던 팀의 승부는 난항을 거듭하고 있지만, 참전 선수들의 게임 기여율 등을 알아맞히는 데서 전국 1위를 했다. 아들의 아이디가 1위에 랭킹 되어 있는 걸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공부로는 거의 보지 못했던 1이라는 숫자. 대한민국인 다수가 즐기는 게임에서 가시성을 확보하다니. 우리 집 남성들에게 오늘은 무척 의미 있는 날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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