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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자 Nov 29. 2020

고시원의 추억

20대 흔적이 담긴 곳


돈을 아끼고 아껴도 부족했다. 회사에서 고시원까지는 버스 세 정거장. 하지만 한 푼이라도 아끼자는 생각으로 30분 거리를 걸어다녔다. 고시원에 도착하면 다리가 뻐근했다. 나는 종로 일대 고시원에서 가장 싼 방에 살았다. 바깥 창문과 냉장고가 없는 한 평 짜리 방. 보증금 없이 한 달에 23만원만 내면 됐다.


가세가 점점 기울어가던 2008년,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이 압류되면서 급하게 고시원에 들어갔다. 압류만은 막아보려고 여러 금융기관에서 대출까지 받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대출금과 카드값이 빠져 나가고 고시원 월세까지 내고 나면, 남는 돈이 적었다.


그래서 저녁은 고시원 근처 분식집에서 파는 1500원 짜리 김밥 한 줄로 해결했다. 한 줄을 먹고 나면 늘 아쉬웠다. 한 줄만 더 먹으면 행복할 것 같았다. 가끔 욕심을 부려 2줄을 먹은 날도 있었지만, 통장 잔고를 생각하며 참은 날이 더 많았다.


방에는 작은 TV가 있었지만 거의 틀지 않았다. 방음이 안 돼서 옆방에 소리가 다 들리기 때문이다. 간혹 TV가 보고 싶으면, 아주 작은 소리로 틀어놓고 영상만 봤다. 몇 번 보지도 않은 TV는 얼마 안 가 고장이 났다. 결국 좁은 방에서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빨래도 쉽지 않았다. 공용 세탁기 2대는 쉼 없이 돌아갔다. 내 방과 세탁기를 몇 번이나 오간 끝에 겨우 빨래를 돌렸는데, 빨래를 널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방에 일주일치 빨래를 널었더니 움직일 공간이 부족했다. 빨래를 할 때마다 고생스러웠다.


고시원 사장님은 여자였지만, 입실자 중엔 여자가 거의 없었다. 고시원을 오가면서 마주친 건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복도와 옆방에서도 남자 목소리가 자주 들렸다.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문을 꼭꼭 잠갔다. 전화가 오면, 고시원 밖으로 달려 나가서 받았다. 옆방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옆방에 여자가 산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집 생각만 하면 마음이 답답했다. 고개만 돌리면 아파트가 넘쳐나는 서울에 내 집은 없었다. 나의 미래는 쉬이 그려지지 않았다. 고시원에 사는 동안, 고시원 화재 사건이 자꾸 발생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를 걱정한 지인들은 주말마다 나를 불러냈다. 힘든 시기였지만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 회사에 출근해 바쁘게 일하는 시간이 오히려 행복했다. 책도 많이 읽었다. 부지런히 책을 읽고 싸이월드에 독후감을 남겼다. 그게 회사 다니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던 것 같다.


나의 고시원 생활은 13개월간 이어졌다. 당시 머무른 고시원을 검색해보니, 리모델링을 해서 예전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듯 하다. 고시원은 나의 인생 궤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되었다.


당시 머물렀던 고시원의 복도


PS. 나는 몇 년 후 대출금을 다 갚았다. 그리고 고시원에서 나온 지 5년 만에 결혼했다. 남편이 마련한 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남편이 주택청약에 당첨돼, 올해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운이 좋았다. 남편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가끔씩 집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길을 가다 고시원 간판을 보면, 지금도 문득 그 때 생각에 잠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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