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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자 Nov 24. 2020

데스크 체험기

월화수목금금금과 희노애락


운이 좋았다. 39살에 일찍 데스크가 됐다. 보도국 보도제작부장. TV와 라디오 보도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라 책임감이 막중했다.


데스크가 되고 보니, 개편이 보름 밖에 남지 않아 할 일이 너무너무 많았다. 당장 업무분장부터 새로 짜야 했다. 앵커, PD, 출입처 등을 재배정하고, 코너 런칭까지 속전속결로 진행했다. 시간에 쫓겨 매일 야근했지만, 개편만 되면 한숨 돌릴 것 같았다.


회사에서 만들어준 데스크 명함


기우였다. 데스크를 맡은 1년 6개월 동안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보도의 중심이 라디오에서 TV로 옮겨가던 때라 일이 더 많았다. 뉴스 아이템을 확정하고, 취재기자를 배정하고, 기사를 데스킹하는 건 기본이었다. 여기에다 촬영 일정을 조율하고, 차량을 배차하고, 영상과 자막을 확인하고, 출연자 의전과 리허설까지 챙겨야 했다. 취재도 병행했다. 휴가자가 많거나 손이 부족할 땐 직접 현장에 나갔다. 전국 각지에서 취재를 요청하는 전화도 많이 왔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회의에 들어가고, 서류를 결재하고, 기안과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행정 업무도 적지 않았다. 가제트 형사가 된 기분이었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가장 공들인 일은 기사 데스킹이었다. 기사 하나를 데스킹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팩트가 틀린 건 없는지, 제목은 잘 뽑았는지, 영상은 충분한지, 자막은 적절한지 살펴볼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연차가 낮은 기자의 기사일수록 손 볼 데가 더 많았다.


일이 많은 날엔 밥 생각이 없었다. 일을 하나라도 더 처리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다들 밥 먹으러 나간 점심시간엔 말 거는 사람이 없어 일이 더 잘 됐다. 그래서 식사 약속을 빡빡하게 잡지 않았다. 이미 잡은 약속도 늦거나 취소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저녁엔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하자는 생각으로 식사를 거르는 일이 잦았다. 그렇게 서둘렀는데도 밤 늦게 퇴근하곤 했다.


TV 뉴스는 평일에만 방송됐지만, 종교방송 특성상 주말에도 일이 있었다. 취재 때문에 회사에 나오는 날도 있었고, 집에서 기사를 데스킹하는 날도 많았다. 말 그대로 월화수목금금금이었다.


올 여름 회사 선배가 찍어준 사진


취재기자와 데스크를 동시에 커버하는 일상이 힘에 부쳤지만, TV 뉴스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을 땐 성취감을 느꼈다. 기자들의 발제가 좋을 때, 유튜브 조회수와 댓글이 많을 때, 구독자가 팍팍 늘 때도 행복했다.


데스크를 하며 나를 떨게 한 말이 있다. 바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다. 드릴 말씀은 보통 장기휴가를 가겠다거나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것, 둘 중 하나였다. 그렇게 1년 사이에 두 명의 후배가 회사를 떠났다. 사람은 줄었는데 일은 줄지 않았다. 하루에 나 혼자 아이템 3개를 커버한 날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늦은 퇴근은 더 늦어졌다.


나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가 아니었다. 지적해야  일이 생겼을 , 싫은 소리를 하는  힘들었다. 주말 취재를 지시하는 것도 마음의 부담이 컸다.  힘들어도 내가 일을  하는  마음이 편했다. 상사와의 의견 충돌도 이어졌다.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갔다.


9월 초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오래된 다리 통증도 여전했다.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이 반복되다 보니, 집에선 다정한 아내가 되지 못했다. 지인들을 만나는 것도 귀찮고 부담스러웠다. 모임보다 휴식이 급했다. 워라밸을 맞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루틴을 시도하며 노력해봤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갑자기 터진 속보를 처리하고, 저녁 행사를 커버하다 보면 퇴근은 다시 늦어졌다.


결국 나는 회사에 데스크 사퇴 의사를 밝혔고,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조직개편과 인사발령으로 11월부터 데스크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놨다. 후임 데스크에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밀린 휴가를 길게 냈다. 휴가 중에 시작한 브런치. 제주를 여행하며 짬을 내서 글을 쓰고 있다. 휴가가 며칠 남지 않았다. 이제 평기자로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제주 카멜리아 힐에서 만난 풍경과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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