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의 나비효과
"선배 안녕하세요!"
"혹시 말이야....."
20년 만에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졌던 2012년. 나는 국회를 출입하고 있었다. 정신 없이 기사를 쓰다가 한숨 돌릴 겸 화장실로 향하던 길이었다. 정론관(당시 국회 기자실) 복도에서 타사 선배를 만났다. 친하게 지내는 선배는 아니었지만, 다른 선배들과 같이 식사한 적이 있어서 마주칠 때마다 꼬박꼬박 인사를 드렸다. 그날도 내가 먼저 웃으면서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선배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더니 뜻밖의 제안을 했다.
경제민주화에 대해 같이 스터디할 생각이 없냐고 했다. 기자 10명을 모았는데, 1명이 갑자기 빠지게 됐다고 했다. 귀가 번쩍 뜨였다. 경제민주화는 2012년 대선의 최대 화두였다. 대선후보들이 앞다퉈 경제민주화 공약을 내걸었고 공방도 치열했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하겠다고 말했다. 선배는 스터디 내용을 책으로 펴낼 계획도 있다고 말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의 관심은 책이 아닌 스터디에 있었다.
9월부터 스터디가 시작됐다. 대선이 코앞이라 다들 시간을 내기 어려운 만큼, 점심시간을 주로 활용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모였던 것 같다. 식사는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먹고, 경제민주화 전문가 14명을 만났다.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학계와 단체 가리지 않고 두루 만났다. 우리가 만난 전문가들의 명단은 이렇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김종인 전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
강석훈 새누리당 의원
김기식 민주통합당 의원
홍종학 민주통합당 의원
은수미 민주통합당 의원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본부장
전원책 자유경제원 원장
멘토들의 명강의를 듣고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으면서,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경제민주화의 윤곽이 잡혀갔다. 스터디는 대선 후 이듬해 1월까지 이어졌다.
간사를 맡고 있던 타사 선배는 다시 기자들을 소집했다. 책을 내자고 했다. 추진력이 좋은 선배는 각자 할 일을 분담해줬다. 나도 일정 분량을 맡아 원고 작성에 들어갔다. 스터디 내용을 복기하고 자료를 정리하면서 복습하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공부한 내용을 많은 사람들이 볼 생각을 하니 책임감이 들어 더 꼼꼼하게 작업했다. 그렇게 모두의 노력이 더해져 3월 초 <경제민주화 멘토 14인에게 묻다>가 세상에 나왔다.
내가 책을 내다니, 신기하고 짜릿했다. 혼자서 낸 책도 아니고, 창작물도 아니었지만, 교보문고에 깔린 책을 보면 마냥 흐뭇했다. 매일 포털사이트에 제목을 쳐보고, 수시로 서점에 들러 책이 얼마나 나갔나 확인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국회 출입기자들인 만큼, 출판기념회는 국회 의정기념관에서 열었다. 멘토가 되어준 전문가들도 초청했다. 유명인사들이 모이니 언론도 관심을 보였다. 내가 사회를 맡았고, 기자들과 함께하는 토크콘서트 형식으로 진행했다. 출판기념회가 무사히 끝나고 다같이 한잔했다. 건배사는 '경민아 사랑해'. '경민'은 경제민주화의 준말이다.
우리는 지금도 만난다. 몇 년 전엔 MT도 갔다. 각자 소속은 다르지만, 직업을 바꾼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끈끈하고 정겹다. 우리의 카톡방 이름은 건배사와 같은 '경민아 사랑해'다. 당시 공부한 내용이 기사 작성이나 인터뷰에 도움이 된 건 두말 할 필요도 없다.
후배들에게 책을 낸 사연을 얘기하면서 강조하는 게 있다. 바로 인사의 중요성이다. 8년 전 그날 정론관 복도에서 타사 선배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책 발간은 고사하고 스터디도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사 덕분에 기회를 잡았다. 우연이었지만 우연이 아니기도 했다. 그래서 출입처나 취재 현장에서 선후배 가리지 않고 되도록 먼저 인사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인사를 잘해서 손해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소중한 인연과 알찬 공부, 책 발간까지... 모두 인사가 가져다준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