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_인페르노_제5곡
1. Read Me & Note Me
이제 본격적인 지옥 여행이 시작되었다. 림보를 지나 도착한 두 번째 지옥(사실상 첫 번째 시옥이다)은 이성을 욕망의 멍에로 씌운 잔인한 자들과 음탕한 자들이 형벌을 받고 있다. 지옥의 태풍은 그들을 맹렬하게 휘두르고 회오리로 때리며 괴롭히고 있다. 음탕한 자들, 바람기가 충만했던 그들은 큰 바람이라는 형벌 속에 고통받고 있다는 상상력은 너무 절묘하다. 이에는 이, 바람에는 바람인 것이다.
자세 보니 이 어두운 폭풍우 속에 벌 받고 있는 이들은 너무나 유명한 사람들이다. 앗시리아 제국 리누스 황제의 아내 세미라미스로 시작해,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트로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절세미인 헬레네와 그의 애인 파리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 등등 고대와 중세를 장식했던 세기의 사랑의 주인공들이 총망라되어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일일이 나열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므로 다음 기회로 넘길 수밖에 없다. 오늘은 사랑의 본질에 관한 단테의 생각을 한번 따라가 보려 한다.
ch'Amor di nostra vita dipartille. Poscia ch'io ebbi 'l mio dottore udito nomar le donne antiche e' cavalieri, pietà mi giunse, e fui quasi smarrito. I' cominciai: 'Poeta, volontieri parlerei a quei due che 'nsieme vanno e paion sì al vento esser leggeri.' Ed elli a me: 'Vedrai quando saranno più presso a noi; e tu allor li priega per quello amor che i mena, ed ei verranno.' Si tosto come il vento a noi li piega, mossi la voce: 'O anime affannate, venite a noi parlar, s'altri nol niega!' Quali colombe dal disio chiamate con l'ali alzate e ferme al dolce nido vegnon per l'aere, dal voler portate, cotali uscir de la schiera ov' è Dido, a noi venendo per l'aere maligno, sì forte fu l'affettuoso grido. 'O animal grazioso e benigno che visitando vai per l'aere perso noi che tignemmo il mondo di sanguigno, (Inferno 5: 73~87)
나는 말하기 시작했다. “시인이여, 바람에 실려 가볍게 날아가는 저 두 영혼과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게 될 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이끄는 사랑의 이름으로 너와 말하기를 간청하면 그들이 네게 올 것이다. 사랑이 부르면 흔들림 없이, 날개를 활짝 펴고 포근한 둥지를 향하여,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비둘기처럼, 이 두 영혼은 디도의 무리에서 나와, 지옥의 허공을 가르고 우리에게 왔다. 나의 진정 어린 외침이 효력을 발휘했다. (지옥 5: 73~87)
그런데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바람에 날아가는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와 영혼과 말하고 싶다고 간청한다. 그 두 영혼은 단테의 부름에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다. 그들을 불러내는 말이 너무 아름답다.
“사랑이 부르면 흔들림 없이, 날개를 활짝 펴고 포근한 둥지를 향하여,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비둘기처럼” (지옥 5:82~84)
이 두 주인공의 유명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아담을 유혹해 죄를 짓게 했듯이 프란체스카는 파올로를 유혹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많은 비평가들은 프란체스카의 애절한 사연에 감동했다. 나아가 그녀와 파올로의 사랑이 지옥마저 따스하게 변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뜨거운 사랑은 지옥에서도 이어져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게 했다. 단테는 이 두 커플을 위해 이렇게 얘기한다.
Amor, ch'al cor gentil ratto s'apprende, prese costui de la bella persona che mi fu tolta, e 'l modo ancor m'offende. Amor, ch'a nullo amato amar perdona, mi prese del costui piacer sì forte che, come vedi, ancor non m'abbandona. Amor condusse noi ad una morte. Caina attende chi a vita ci spense.' Queste parole da lor ci fuor porte. (Inferno 5: 100~108)
사랑은 숭고한 마음에 바로 스며드나, 내게서 없어진 아름다운 몸으로 이 사람을, 나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날 아프게 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사랑을 요구하니, 그의 아름다움은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고, 보시다시피 지금도 나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하나의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카이나는 우리를 죽인 자를 기다기고 있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이런 말들을 했다. (지옥 5:100~108)
우리가 림보(Limbo)에서 보았듯이 단테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구원해 달라고 신께 기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단테는 과도한 욕정으로 지옥에 온 많은 이들을 위해서도 연민의 마음으로 고통 속에 희망도 없는 그들의 사연을 듣고 신께 신원하고자 경청하고 있다. 그러나 2곡에서 단테가 신원하고 있는 것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있는 자들만이 아니다. 그는 바로 그들의 고통 속에서 베아트리체를 향한 자신의 욕망과 사랑의 마음을 들여다봤을 것이다. 단테 신곡의 모티브가 되었던 그의 또 다른 작품 ‘새로운 삶’을 살펴보면 단테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욕정의 지옥에 있는 자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새로운 삶 표지>
나는 그처럼 기쁨에 넘친 나머지, 마치 무엇에 취한 듯이, 함께 있던 사람들과 헤어져 내 방의 어느 고적한 곳으로 들어가 자리를 잘 잡고 앉아 지극히 정중한 그 숙녀에 대해 숙고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생각하면서, 나는 온화한 잠에 빠져 들었는데, 거기서 어떤 경이로운 환영이 내게 나타났다. 내 방에서는 어떤 화염 같은 빛깔이 구름이 그리고 그 안에는 보기에 섬뜩한 느낌을 주는 어떤 남자의 형태가 보이는 듯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즐거워 보였기 때문에, 그 자체로 경이로운 한 장면이었다. 그가 많은 것을 말하였고, 나는 그중 일부만 이해하였다. “내가 그대의 주인이로다” 나는 그의 팔에서 자고 있는 여인을 보았던 것 같다. 그녀는, 한 겹의 주홍빛 천으로 헐겁게 감사여 있긴 했지만, 나체였다. 그녀를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니, 나는 그녀가 전. 날 겸손한 인사를, 축복에 찬 인사를 건네준 바로 그 숙녀임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내게 너무나 큰 괴로움을 안겨주어서, 나는 가벼운 잠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잠은 깨어졌고 나는 깨어났다. <새로운 삶, 단테, 부북스>
단테는 신의 계시 속에 나체의 베아트리체를 상상한다. 성(聖)과 속(俗)이 교차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위의 서술을 보며 단테를 변태스러운 인간이라고 욕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아름다운 필체를 통해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단테는 아홉 살에 아버지와 함께 이웃에 살고 있는 부유한 은행가 프르티나리 댁에 갔을 때, 베아트리체(Beatrice)를 처음 보았다. 어린 그는 그녀를 염모 하게 되었고 9년 후에 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와는 잠깐 인사를 건넨 것으로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그녀가 다닐 법한 거리를 서성이기도 했지만 다시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시를 써서 자신의 연모의 마음을 공표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부끄러웠는지, 그런 방식이 그녀에게 누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 생각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단테는 그녀에게 공개적으로 연정을 표명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숙녀를 대리로 내세워 시들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 소문이 베아트리체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때부터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 인사하기를 꺼려했고, 공식적인 모임에서 단테를 만나더라도 그를 무시했다. 단테는 그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1285년 단테는 젬마 도티와 결혼했고, 같은 해 베아트리체도 은행가 시모네 데이 바르디와 결혼했다. 그들은 같은 성당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1290년 베아트리체를 이른 나이에 하데스로 데려갔다. 단테는 1292~94에 걸쳐 쓴 산문과, 시로 구성된 <새로운 삶을> 작성했다. 이 작품은 280년이 지난 1576년에 비로스 그의 고향 피렌체에서 책으로 처음 인쇄되어 출판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짝사랑의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안다. 단테가 얼마나 가슴 아픈 시절을 보내며 아름다운 시와 글로 그것을 승화했을지. 만약 베아트리체와의 연정이 현실의 사랑으로 이어졌다면 단테 신곡과 같은 아름다운 작품들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단체의 애틋한 사랑의 마음은 그의 작품 곳곳에 배어난다. 야콥 부크하르트는 ‘이런 상상과 환상들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이 자신의 내밀한 삶을 깨닫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디게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단테의 사랑 이야기는 너무 아프고 슬프다. 단테의 꿈속에 나타난 나체의 베아트리체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욕망이 심연의 무의식을 뚫고 나온 ‘슬픈 사랑의 서’이다.
E quella a me: 'Nessun maggior dolore che ricordarsi del tempo felice ne la miseria; e ciò sa 'l tuo dottore. (Inferno 5: 121~123)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당신의 선생님께서는 잘 아시겠지만, 비참할 때 행복한 시간을 기억하는 것만큼 커다란 고통은 없습니다. (지옥 5:121~123)
『구약성서』에 따르면 최초의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벗은 채로 살았다. 아담과 이브는, 벌거벗고서도 전혀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어 이른바 ‘원죄’를 저지르고 난 후 부끄러운 마음이 생겨 나무 잎사귀로 몸을 가렸다.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까지는 아무런 거리낌 없는 모습으로 서로를 대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후부터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던 성행위를 ‘죄악 시’하기 시작했다. 성경의 이런 설화는 인간이 윤리적 판단을 시작하면서 성적 본능을 더 이상 순수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인간인 성적 본능을 가진 존재다. 여타의 동물들이 식욕과 성욕을 좇아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반면, 인간은 먹는 것과 성교하는 것으로만 일관하는 삶을 부끄럽게 여긴다. 특히 성욕을 아주 은밀한 것으로 생각하고, 타인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금기시하고 숨기려 노력한다. 우리는 성적이 욕망을 표출하는 것을 타락한 것이나 천박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 성적인 욕망을 초월해 존재하는 인간은 없다. 성적인 것을 은폐하는 것은 정말 거룩한 영혼을 가진 인간의 특권일까?
자연에서 보면 ‘아름다움’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성적 쾌락’과 다르지 않다. 아름다움은 곧 관능적 쾌감을 주는 것이다. 관능적 쾌감은 아름다움으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 수컷 공작은 늠름한 자태로 깃털을 자랑하며 자신의 아름다움 모습을 펼친다. 그런데 그 깃털은 암컷을 유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수컷들은 자신을 더 아름답게 치장한다. 수컷 공작이 화려한 깃털을 자랑하는 것도 암컷을 유인하여 성적 쾌락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 것이다. 그들의 몸은 대체로 윤기 있는 금속성 청록색이다. 각각의 꼬리깃 끝에는 무지갯빛 눈(eye) 모양의 무늬가 있다. 과시행동을 할 때는 처진 꼬리깃 밑에 있는 꼬리를 들어 올려 펼쳐 보이며, 점잔을 빼며 걷고, 꼬리깃을 떨어 소리를 낸다. 이렇듯 ‘아름다움’의 뒤에는 언제나 성적 쾌락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이 이성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면 격정의 정념이 일어난다. 인간의 에로스의 매혹 앞에서 자신의 모든 높이와 깊이를 체험한다.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 같은 무모함, 강한 자기 과시, 광포한 충동, 무절제한 욕망 등은 스스로의 마음속에 태풍이 되어 모든 것을 흔들어 버린다. 불타오르는 욕망은 항상 위험천만하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움이야 말로 수수께끼이다’라고 이야기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은 도무지 파악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 인간은 아름다움 앞에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괴로움에 시달리고, 유혹당하고, 환장하게 하고, 빠져버리는 일은 도저히 적당한 선이란 존재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이다.
그러나 언제나 인류는 이런 광포한 사랑의 유혹을 경계해 왔었다. 인류는 문명의 전개과정에서 육체적 억압, 성적 죄의식 조장, 금욕주의적 종교 강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적 욕망을 억압하려 했다. 평생 정부의 탄압 속에서 배제되었던 마광수 교수는 인류의 역사는 ‘가리는 쪽’과 ‘벗는 쪽’이 벌이는 격렬한 투쟁으로 이어져왔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인간의 원초적 자유로움을 인정하자는 쪽’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해져 가는 듯하다. 그러나 어떤 사회도 개인의 완벽한 자유를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특히 한국은 겉으로는 자유와 민주를 내세우면서도 성 의식에 있어서만은 은폐하고 금기시하는 유교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우리를 왜 아프게 하는가? 또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이야기는 왜 아름다운가? 그것의 이룰 수 없는 이와의 사랑이 바로 나의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괴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아픈 과거를 숙고한다. 그것은 바로 이런 비극이 우리에게 카타르시스(이 단어가 사물의 더러운 것을 없애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를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극적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참한 운명을 보고 간접 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의 두려움과 슬픔이 해소되고 마음이 깨끗해지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나 상처를 언어나 행동을 통해 외부로 드러냄으로써 강박 관념을 없애고 정신의 안정을 찾기도 한다. 이것이 비극의 신비이고 힘이다. 우리가 이루지 못한 또 것에 대한 슬플 이야기 속에서 상처받은 자아는 고개를 쳐든다.
우리는 굴종적으로 우리를 억압하고 배제하고 거세하려고 했던 그 모든 것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때 우리는 경찰이 여성의 미니스커트 길이를 단속하고, 무수한 대중 예술이 검열당했던 웃픈 역사를 경험했다. 무수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지금이 막 거울처럼 이제 딱 자신과 마주하는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찾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음에는 또다시 우리를 억압하고 배제하려는 어떤 그런 체계나 주체에게 우리가 그냥 당하지 않겠다 하는 자의식을 키워야 한다.
인간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볼 때 다만 몇몇 개인만이 그런 상황 속에서 헤쳐 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주위의 비웃음과 경멸을 무릅쓰고,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를 당당하게 내보이려고 애썼다. 고래로부터 통치하는 자들은 우리가 일은 하지 않고 섹스만 할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성적 쾌락을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일반인들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입시켜 오로지 ‘생산 인구’의 양산만이 거룩한 것이라 강조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의학과 보건기술의 발달로 일반인들도 ‘성적 쾌락을 즐기기 위한’ 환경이 조성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아직은 보수적 성관념이 우세한 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존의 성적 죄의식에 따른 ‘자아분열’을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성에 대한 지식이 다른 것들에 대한 지식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은 결코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우리는 성적 개방성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두려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는 구속하는 도구였고, 우리를 형벌 속에 붙잡아 두는 쇠사슬이었던 것을 기억했으며 좋겠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 정말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내 이웃은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며 우리를 관심을 거룩한 형태의 사랑으로 돌리려 한 것은 아닐까? 부부는 우정관계로 평생을 함께 사는 것은 정말 바람직한 것인가? 이웃을 사랑하는 거룩한 마음은 진정한 사랑일까? 이런 사랑의 개념적 말들이야 말로 우리의 실존을 윤리적인 수준에서 규정하고, 우리 안에 들끓고 있는 욕망을 거세해 버리려는 누군가의 교묘한 책략은 아니었을까?
나는 욕정에 충실한 동물과 같은 삶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심연에 숨어있는 욕망이 꽃피워 보기도 전에 금기라는 이름으로 거세되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나아가 그 욕망은 나쁘고 숨기고 거세해야 한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 꼭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오늘 또 이런 고민을 하며 지옥의 한 모퉁이를 헤매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욕망을 선용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의 유명한 말을 기억해 본다.
Desidero, ergo sum
(나는 욕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2. Remember Me
#지옥 #사랑하지않는고통 #사랑#성의역사 #감시와처벌 #아름다움 #구원
3. 참고 자료
The Devine Comedy by Dante_Inferno, Dante Alighieri, the classic
La Divina commedia, Inferno, Dante Alighieri
신곡 지옥(인페르노), 단테(이시연 역), 더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