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러의 칸트 비판
1. Note Me & Read Me
오늘 아침 지옥편 제5곡을 읽다가 음욕으로 인해 지옥에 온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쓰여 글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과도한 사랑은 파멸은 낳는다. 그러나 많이 사랑했다는 이유로 지옥에 온 사람들을 생각하니 왠지 그들을 변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클레우파트라, 헬레네, 파리스….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천하를 쥐고 흔들었던 시대의 로맨티시스트들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이 내용은 좀 더 숙고가 필요할 듯하다.
<아이의 카톡 메시지>
어제 새벽 큰아이가 국어 공부를 하다가 쉴러가 칸트의 윤리학을 비판하는 지문을 읽고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얼마 전에 내가 쓴 글에서 칸트를 읽었는데 반가웠나 보다. 그러나 나는 아이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이 아침에 맘이 편하지 않다. 나는 쉴러의 작품을 읽어 본 적이 없다. 한국 사람들 중에 쉴러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학교에서는 칸트와 쉴러를 비교하는 본문을 해석하는 문제를 낸다. 그뿐 아니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니체, 하이데거, 후설 등등 일반인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어떤 분의 주장에 따르면 인문학 공부는 취미로 해야 할 판인데 고등학생들은 고차원의 인문학적 담론들을 객관식으로 풀어내고 있는 현실이 실로 씁쓸하다. 교사들은 저 내용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걸까? 아이들은 저런 문제를 풀어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쨌든 아이와의 진정성 있는 대화를 위해 부랴부랴 쉴러의 책 몇 권을 주문했다.
https://brunch.co.kr/@justinryu/109
<최근에 칸트를 인용한 글>
칸트는 내 마음속에 있는 빛 즉, 어떠한 조건이나 결과에 상관없이 그 행위 자체가 선(善)하므로 절대적이고 의무적으로 행할 것이 요구되는 도덕 법칙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아이가 보내준 지문을 보니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해 쉴러가 비판한 모양이다. 쉴러는 이러한 칸트의 주장이 인간의 이성적 능력만 강조한 나머지 인간을 개별성을 간과하고, 인간을 몰개성의 존재로 여기는 우를 범했다고 비판했다. 쉴러는 인간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감정작용의 통일체라 생각했다. 인간은 외부의 대상들을 가치의 위계로 구분하고 각각의 가치를 지닌 대상을 단순히 이성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감성적으로 인식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쉴러는 이런 자신의 주장을 몇 차례 서신으로 괴니히스베르그의 현자(칸트)와 소통했다는 점이다. 근대의 문을 열어 재친 거대한 철학적 산맥과 당대의 위대한 극작가이자 역사학자이며 철학자인 쉴러의 영혼이 서로 만나 공명했다. 다소 기계론적 세계관에 머물러 있었던 칸트를 넘어 물질과 정신, 소재와 형식, 상황과 인격을 대립시키지 않고 종합명제로 끌어안으려 했던 쉴러의 의도를 칸트도 어느 정도 이해했던 듯하다. 쉴러, 헤겔, 쇼펜하우어 등의 칸트 이후 철학자들은 서로 대립하는 듯하면서도 다양성 가운데 통일되는 총체성과 전체성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칸트의 빛 가운데 더 큰 태양을 꿈꾼 그들의 연결과 연대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사실 내가 쓰고 있는 모든 글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보내는 나의 유언장이나 다름없다. 비록 지금은 내 글을 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인생의 터닝포인트에서 자신의 아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고뇌한 삶의 의미들을 스스로 곱씹어 읽을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나는 이 글을 잘 쓰고 싶다. 어떤 의무감이나 아집을 넘어서, 나와 네가 함께 살아가야 할 인생에 대해 깊이 대화해 보고 싶다. 오늘 큰 아들이 물어다 준 쉴러와 칸트의 대립되는 논쟁 속에서 나는 한 줄기 빛을 바라본다. 오늘 저녁에 사춘기의 아이와 이 이야기를 나눌 생각에 맘이 설렌다. 이게 웬일인가? 쉴러라니, 칸트라니?!
2. Remember Me
#나의유언장#아들의카톡#칸트정언명령#쉴러윤리학#쉴러미학#쾨테#괴니히스베르그
3. 참고 자료
실천이성비판, 칸트, 아카넷
기본확립국어 지문2(아들이 보내 준 문제집의 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