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작품에 나타난 초인 사상과 그 한계
살인자 O난감_죄와 벌의 현대적 오마주 II
들어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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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의 작품 감상을 위해 최대한 드라마의 줄거리는 배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드라마의 구체적 내용을 가지고 작품 해설할 시간이 곧 오겠지요? 그때까지는 드라마와 소설 <죄와 벌>을 충분히 음미하실 수 있길 기대합니다. 다음 팟캐스트는 <죄와 벌>과 <살인자 ㅇ난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 입니다. 우연이지만 필연처럼 다가온 작품이라 더욱 기대 됩니다. 많은 애청 부탁 드립니다.
1. 살인자 ㅇ난감 흥행 성공?!
살인자 ㅇ난감이 흥행에 성공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원작의 풍부한 주제와 범죄 수사물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아 받았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과 장면으로 이어지는 수작이라 평가받고 있다. 지난 글에 이어 작품의 스토리보다는 작품에서 사용한 <죄와 벌>의 주요 이슈와 상징의 해석을 통해 <살인자 ㅇ난감>이 다루고 있는 주제의 실체에 접근해 보려 한다. 이번 글까지도 아직 <살인자 O난감>를 시청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오늘 글에서는 드라마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하려 노력하겠다.
2. <죄와 벌> 성공의 시대를 열다
<대학생 이탕, 탕아라고도 불린다, 출처: 넥플릭스>
1866년 모스크바에서 대학 휴학생 다닐로프가 고리 대금업자 포포프와 그 하인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주요 일간자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고, 이듬해 2월 다닐로프의 형이 확정될 때까지 심리 과정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다닐로프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도스토옙스키였다. 그는 1865년 인간으로서 또 작가로서 인생의 가장 절정기인 45세의 나이에 <죄와 벌>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1866년 1월부터 [러시아 통보지]에 <죄와 벌>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잘 알 듯 가난한 휴학생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동생을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한다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다닐로프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소설을 이미 소설의 초고를 완성했다. 오히려 다닐로프는 잡지에 게재된 1회분 소설을 읽지 않은 시점에 범죄를 저질렀다. 놀라운 우연의 일치이다.
다닐로프 사건이 맞물려 <죄와 벌>은 도스토옙스키를 일약 스타로 발돋움시켰다. 구독자 수가 증가했다 당시 <죄와 벌>은 연재소설이었으므로 회기가 증가할수록 독자들은 열광했다. 독자들은 현실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이 입체적인 캐릭터가 살이 있는 소설로 변한 것이라 착각했다. 이이서 1866년 4월 모스크바 대학을 중퇴한 카라코조프가 입구에서 황제를 시해를 시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대학생이 황제 암살을 시도한 사건으로 러시아는 충격에 빠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은 사태의 중심에 있었다. 독자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소설의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를 떠올렸다. 가난한 대학 중퇴생, 노파 살인 등의 주제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재현하고 있는 것 같았기 대문이다. <1866년 한 해 동안 독자들은 오로지 하나 <죄와 벌>만 읽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갑작스러운 인기에 고무되었다. 그러나 그는 시베리아 유형지에서부터 이 소설을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 그가 친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형, 기억나? 내게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았다면, 형기를 마친 후 쓰고 싶다고 했던 소설 말이야. 내 가슴과 영혼을 모두 이 소설에 쏟아부을 거야. 고뇌 속에서, 나 자신이 둘로 갈라지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순간에, 나부 판때기에 누워 형기를 채우며 이 생각을 생각했어. 그 소설은 결정적으로 내 명성을 높여 줄 거야”<1859년, 형에게 쓴 편지>
<록키 산맥, 출처: 위키피디아>
죄와 벌의 창작 과정을 보면 마치 <살인자 O 난감>의 흥행 스토리와 오버랩되는 듯하다. 물론 지금의 현실 속에서 <살인자 o난감> 같은 대학생 연쇄살인마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회 트렌드를 잘 반영하면서 범죄 스릴러의 특성을 잘 갖춘 보기 드문 수작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가난한 대학생, 깜깜한 자신의 앞날 앞에 삶을 이어 나가는 것은 두렵고 힘들기만 하다.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의 일상을 브이로그에 닮은 유튜브 영상을 시청한다. 그 영상 속에서 유튜버는 록키산맥을 연상시키는 배경 앞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여러분, 아마도 천국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요? 주인공은 그날로 그림을 한 장 구입한다. 유튜브에서 본 듯한 설산 그림이다. 그는 꿈꾼다.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 이대로는 안된다. 무언가 신박한 변화가 필요하다. 아르바이트비를 열심히 모아 캐나라도 갈 것이다. 그냥 주어진 우연한 일상이 아니라 무언가 필연적이고 희망적인 미래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그림을 벽에 고정하려 하지만 망치가 없다. 천국을 꿈꾸고 있으나, 그것을 실현할 도구가 없다. 절망적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3. 반복된 우연은 필연으로 이어진다.
<죄와 벌_술집에서, 출처: 위키피디아>
라스꼴리니코프는 K 다리를 걸으면서 노파 살해에 대한 저주스러운 몽상을 버리겠다고 신에게 기도했다. 그는 그 저주스러운 주문, 마술과 마력, 그리고 그 죽음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를 또 다른 결정적이면서도 우연한 만남으로 이끈다. 바로 라자베타와 만나게 된 것이다. 약 9시경 싸구려 음식점과 더럽고 악취 나고 술 취한 노동자들과 누더기 차림의 사람들이 우글대는 센나야 광장을 지난 던 도중 리자테타를 만났다. 수줍음 많고 온순하지만 덩치가 큰 리자베따는 언니가 무서워 꼼짝도 못 하고 밤낮 일하고, 매 맞는 노예 같은 삶을 사는 불쌍한 여인이다. 라스꼴리니코프는 라자베따와 상인의 대화를 통해 우연히 내일 저녁 7시에 노파의 유일한 동거자인 리자베따가 집에 없을 것이며, 노파는 정확히 저녁 7시에 혼자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이 우연 앞에 엄청난 놀라움과 공포를 느낀다. 그의 등골에는 차가운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노파를 죽이라는 신의 계시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고 돌아왔다. 도스토옙스키는 아파트로 들어가는 이 청년의 모습을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묘사했다.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무기력함, 그에게는 더 이상 판단의 자유도 의지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느닷없이 움직 수 없도록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라스꼴리니코프는 우연히 리자베따를 조금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센나야 광장의 상인이 라자베따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게 된 이유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고장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이사 온 어느 살림이 궁핍해진 가족이 가구와 옷가지들, 그리고 부인용 물건을 팔고 있었는데, 시장에서는 좋은 값에 팔 수 없게 되지, 라자베따의 도움이 필요해진 것이었다. 그녀는 수수료를 받고 일을 처리해 주었는데, 언제나 제일 비싼 가격을 불렀고, 한번 부른 값은 절대로 깍지 않았다. 이 착한 라지베따를 보면서 라스꼴리니코프는 어떤 미신의 기운을 믿게 된다. 기괴하지만 신비스럽고, 무언가 특별한 힘과 우연의 일치 같은 것이 존재함을 생각한다.
그러기도 잠시 우연히 들른 술집에서 만난 대학생과 청년 장교의 노파에 대한 부정적인 지적에 라스꼴리니코프는 자신의 살해 의지를 다시 불태우게 된다. 무서울 정도로 인색한 고리대금 업자 노파는 자신의 불쌍한 동생을 괴롭히며 단돈 1 루블도 유산으로 남겨 주지 않으려 하며 동생을 때리고 완전히 노예처럼 부리는 나쁜 인간이다. 흥분한 대학생의 말처럼 모든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노파는 이미 병들었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왜 사는지도 모르고, 얼마 안 있으면 죽게 될 운명일지도 모른다. 노파를 죽여 수백, 수천의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 아닌가? 대학생과 청년 장교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 이 우연의 일치는 어쩌면 어떤 숙명과도 같은 계시가 아니었을까?
4. 이단적 생각의 맹아, 초인 사상
<나폴레옹 전쟁, 출처: 위키피디아>
사실 법대생이었던 라스꼴리니코프는 대학생과 청년 장교가 나눈 대화와 관련한 사상에 대해 논문까지 작성한 상태였다. 그 논문은 범죄가 진행되는 동안의 범인의 심리 상태에 관한 것이었다. 범죄는 항상 병을 수반한다는 특이한 논문이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온갖 종류의 폭력과 범죄를 행할 완전한 권리가 있다. 그들은 어떤 법률도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의 행동은 초법적 권리이다.
이 논문에서 그는 사람을 크게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것으로 구분했다. 평범한 사람은 사회의 체계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법을 어길 권리가 없다. 반대로 비범한 사람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권리와 법률을 위반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사람들이다. 그들의 권리는 공식적인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양심에 의거 모든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믿을 뿐이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신념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그런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가능해진다.
고대 스파르타의 입법자 리쿠르고스, 솔로몬, 마호메트, 나폴레옹 등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입법자들과 제정자들은 새로운 법률을 제시하고, 그로 인해 선조로부터 전해진 낡은 법률을 파괴한 일종의 범죄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사상을 위해 시체와 피를 건너뛰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모두 사회의 유지 발전에 기여한다. 전자는 현재의 사람들로 사회를 보존하고 그 수를 늘린다. 후자는 미래의 사람들로, 세계를 움직여 그 목적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이다. 라스꼴리니코프는 두 부류의 사람 모두 존재할 권리를 완전히 동등하게 소유 있다고 믿었다. 새 예루살렘이 도래하기 전까지!
5. 누가 비범한 사람들인가?
<나폴레옹, 출처: 위키디피아>
좋다. 초인, 나폴레옹, 비범한 인간…. 백번 양보해서 여기에 동의한다고 치자. 그런데 문제가 있다.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느냐의 문제이다. 평번한 사람을 초인과 구분할 수 없다면 우리 사회는 커다란 혼란에 직면할 것이다. 살인과 폭력 그리고 이상적 정의의 실현을 구분할 기준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서로가 죽고 죽이는 살육의 장으로 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에 대해 라스꼴리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들은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말>을 할 줄 아는 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자주 <새로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굴욕적인 사람으로 치부하며 경멸과 조소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진짜 위험한 사람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범한 사람들은 몹시 선량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봉사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늘 대중에게 회개하는 태도를 지녔다. 그들의 일은 아주 아름답고 교훈적으로 결론지어진다. 이것은 본성의 법칙이다. 그들은 스스로 채찍질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때로 그들에게 자기 위치를 상기시켜 주고 위해 주의 환기 차원에서의 채찍질은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채찍질을 행동에 옮길 사람조차 필요하지 않는 자율적 인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비범한>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아야 할 다른 이유가 있다. 이들 <비범한> 인간은 극소수이다. <새로운 생각과 말을 가진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로 태어난다. 그 세부 분류에 속하는 인간들은 마치 탄생의 어떤 질서나 자연의 법칙이 존재하기라도 하듯 적은 숫자로 태어난다. 이런 사람은 종족과 가문의 결합이라는 신비한 방법을 통해 수 천, 수만 명 중 한 사람 정도밖에 태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보다 더 독립적이고 선량한 사람을 수십만 아니 수백만 중 하나고 태어날 것이고, 인류의 완성자는 어쩌면 수억의 사람들이 죽어 간 이후에야 홀연히 나타날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우연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어떤 법칙!
6. 면도의 칼날: 도끼를 든 인간
그후 라스꼴리니코프는 노파 살해의 계획을 거의 완성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들이 확고해지면 확고해질수록 그는 자신의 계획이 추악하고 어리석은 살인에 지나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계속되는 내적 갈등 속에 그는 단 한순간도 자신의 계획이 실현 가능하다고 믿을 수 없었다. 모든 의문을 반박하고 해결하고 숙고되더라도 그는 살인이라는 추악하고 가당찮은 일을 실행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해결되지 않고 미심쩍은 것들은 밑 빠진 독처럼 그의 생각들을 잠식해 갔다.
그가 도끼로 노파를 살해할 계획은 한 것은 다 이런 복잡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휴대가 간편한 접이식 정원용 칼도 가지고 있었으나 도끼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의 힘을 믿을 수 없었으므로 나약한 자의 무기인 정원용 칼이 아닌, 비범한 자의 무기인 도끼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제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도 거의 끝나갔다.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그의 궤변은 날카로워져 어떤 것이 다 배어버릴 것 같은 면도날처럼 나날이 날카로워져 갔다.
그가 논문에도 썼듯이 범죄는 항상 병을 수반한다.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 이성은 조심성을 극도로 필요하게 된다. 그 순간에 이성과 의지는 상실되고,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이상한 경솔함에 빠지게 된다. 이성은 혼미해지고, 의지의 상실은 마치 병치럼 사람을 지배하게 되고 점차 강해져 범죄를 실행하기 직전에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병이 그 범죄를 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범죄 자체가 그 본질적으로 일종의 병과 같이 수반되는 것이냐 이다. 그는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다고 느끼며 무기력해졌다. 이제 믿을 것은 도끼, 그 도끼의 힘뿐이다.
7. 선량한 인간에 대한 이상, 너는 다른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과 드라마 <살인지 O강남>은 젊은 대학생의 살인, 선한 의도를 가진 인간의 정의 실현 그리고 살인을 감행한 후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갈등과 정당성 확보라는 공통 주제를 가진 작품들이다. 그중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에 대해 사유는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위대한 철학자 ‘칸트의 정언의 명령’을 연상시킨다.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이 양자를 나는 어둠 속에 감춰져 있거나 초월적인 것 속에 있는 것으로 내 시야 밖에서 찾고 한낱 추측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것들을 눈앞에서 보고, 그것을 나의 신존 의식과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전자는 내가 외적 감성 세계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서 시작해서, 내가 서 있는 그 연결점을 무한 광대하게 세계들 위에 세계들로, 천체들 중의 천체들로,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주기적인 운동의 한없는 시간 속에서 그 시작과 지속을 확장한다. 후자는 나의 볼 수 없는 자아, 나의 인격성에서 시작해서, 참된 무한성을 갖는 그러나 지성에게만은 알려지는 세계 속의 나를 표상한다. 이 세계와의 나의 연결을 나는 앞서의 세계에서처럼 그렇게 한낱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무수한 세계의 집합의 첫째 광경은 동물적 피조물로서의 나의 중요성을 없애버린다. 동물적 피조물은 그가 된 질료를, 짧은 시간 동안 생명력을 부여받은 후에는, 다시금 유성에게로 되돌려 줄 수 박에 없다. 이에 반해 두 번째 광경은 지적 존재자(예언자)로서의 나의 가치를 나의 인격성을 통해 한 없이 높인다. 인격성에서 도덕법칙은 동물성으로부터, 더 나가가 전 감성 세계로부터 독립해 있는 생을 나에게 개시한다. 적어도 이것이 도덕법칙에 의해 이승의 생의 조건들과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무한히 나아가는, 나의 현존의 합목적적 규정(사명)으로부터 추정되는 만큼의 말이다.
<실천이성비판, 칸트, 아카넷>
<별이 빛나는 밤, 밀레, 출처: 위키피디아>
도스토옙스키는 이런 칸트의 가정이 인간성에 대한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 근대적 오류하고 지적한다. <죄와 벌> 속에서 보듯이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늘 갈등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때때로 순수한 이성과 실천적인 윤리로 정신 무장을 하지만, 시시 때때로 외줄 타기를 하며 선과 악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가난한 대학생 라스꼴리니코프는 그런 인간의 나약함과 선량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인간상이다.
칸트가 꿈꾼 합목적인 현존은 그저 이상에 불과하다. 이 생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무한히 나아갈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번도 세상에 존재한다. 않았다. 리쿠르고스, 솔로몬 마호메트, 나폴레옹 심지어 예수, 석가, 공자마저 인간적 한계 안에서 고뇌했다. 라스꼴리니코프가 도끼를 들었고, 이탕이 망치를 들었던 이유는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며 고뇌하는 나약한 인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살인자의 아들이면서 정의로운 강력계 형사를 꿈꾸었지만 좌절한 또 다른 초인 송춘! 그는 마지막 죽기 전에 이탕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그냥 살았으면 되잖아, 출처 넥플릭스>
이탕
왜 왜 왜 나타난 거야?
당신은 당신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그냥 살았으면 됐잖아
송춘:
필요했으니까.
세상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필요하거든?
근데 너도 나랑 같다면 묻고 싶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확신이 있는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진짜 있는 건지?
너는 달라? 너는 나랑 다르냐? 다르다고 생각해?
확신 있어?
작작 좀 해라. 작작 좀
<확신있어? 작적 좀 해라, 출처: 넷플릭스>
나는 그때 알고 싶었던 거야. 어거 알고 싶었어.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이>인지, 아니면 인간인가를 말이야. 내가 신을 뛰어 넘을 수 있는가. 아니면 넘지 못하는가! 나는 벌벌 떠는 피조물인가, 아니면 권리(타인을 죽일)를 지니고 있는가?
<소냐에게 제를 고백함,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송춘은 궁금했다. 자신이 정의 구현을 위해 평생 동안 악인들을 응징했지만, 자신이 의인인지, 살인마인지? 끊임없는 자기반성 속에 그는 이탕이라는 별을 바라봤는지도 모른다.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 현존에 구애받지 않고 저 순수한 별을 향해 무한히 나아가는 초인! 백만, 천만, 아니 수억의 인구 중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그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어떤 존재라면 그도 삶을 살아갈 의지를 불태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이 드라마는 구태의연한 다른 드라마들처럼 해피엔딩이나 새드앤딩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주인공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언젠가 꿈꾸었던 초법적인 권능을 가졌으나 절대 권력 위에 군림하지 않고 겸손하게 정의를 실현해 나가는 초인을 꿈꾸며.
<참고 문헌>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한나(최호정), 엑스북스
매핑 도스토옙스키, 석영중, 열린책들
실천이성비판, 칸트, 아카넷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