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벌, 라스꼴리니코프의 여윈 말과 토리노의 말
<토리노 전경, 출처: 무리수님>
토리노에 처음 갔을 때 니체는 마음의 여유, 자긍심을 느꼈다. 건강도 기적적으로 좋아졌다. 어느 때보다 풍부한 창작의 영감이 솟구쳤다. 그는 토리노의 도시와 자연을 즐기며 거닐었다. 강둑을 거닐며 충만했고 위버멘시가 되어 충만한 힘에의 의지를 만끽했다. 그는 삶에 충실했고, 감사했으며,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이뤄내고 있었다.
출처: 브런치, 다시 태어나고 싶어서 찾아 나선 곳
토리노의 경치는 아름다웠다. 특히 정오에 포강 강둑에 서 있는 나무들은 맑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시원하고 깨끗한 바람이 불면 완벽히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다. 정오의 태양은 힘의 정점을 알리는 시계와도 같았다. 니체는 생전 도스토옙스키를 극찬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는 하층민과 소외 계층, 죄인들을 일깨워 지배층에 항거했을 거라 믿었다. 오늘날 살아있다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을 거라는 말은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니체는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 북부의 토리노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으로 가는 길에 카를로 알베르트 광장을 지났다. 마침 맞은편에는 마차가 멈춰있었는데 마부가 자신의 늙은 말에게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는 것을 보았다. 무거운 짐마차를 끌고 가던 말은 미끄러운 빙판길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마부의 채찍에 고통받고 있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마부의 채찍은 더 가차 없이 후려쳐졌다.
<출처: 영화 토리노의 말>
니체는 길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채찍을 맞는 말의 목을 부여잡고 흐느껴 울었다. 그가 말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는데 그 얘기를 제대로 들은 사람이 드물다. 후대의 어떤 전기 작가는 '미안하다. 인간들을 용서해 달라'라고 말했다고 상상했다. 니체는 깊은 슬픔 속에 채찍에 고통하는 말의 목을 안고 울었다. 그리고 작은 거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니체는 하숙집 주인이었던 데이비도 피노에 의해 집으로 옮겨졌다. 그 후 그는 식물인간이 되어 11년 동안 정신을 상실한 채 침대에서 보냈다.
사실 니체가 왜 마지막 순간에 말을 붙잡고 목놓아 울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이 새벽<죄와벌>에서 꿈에 어린 라스꼴리니코프가 보았던 꿈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여원 말은 최선을 다해 마차를 끌어 보지만, 마침내 말은 계속 휘두르는 채찍에 쓰러져 갔다.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던 어떤 이가 이렇게 외친다 “도끼로 쳐야지, 그래야 단방에 죽지” 마부는 그의 외침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 쇠지렛대를 집어 든다. 불쌍한 말을 쇠지렛대로 내리쳤다. 말을 비틀거리며 주저앉는다. 몇 차례 타격을 받은 말은 마침내 머리를 축 늘어드리고 숨을 괴롭게 몰아 쉬다가 죽어 버리고 만다."
니체는 원한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감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 가치 기준에 예속하고 복종함으로써 그 감정을 해소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민중들은 자주 원한감정에 사로잡혀 있으며 잘못된 가치를 따라 피의 심판을 보고 싶어 한다고 경계했다. 그러나 피의 심판은 해결책이 아니라 파멸의 전주곡이 되어 우리의 목을 조여 온다. 원한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죄와벌>이나 <살인자O남감>에서 보여준 임의 살인은 더더욱 안된다. 드라마는 매우 재미있었지만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무서운 발상이다.
니체는 아마 토리노의 말을 보며 <죄와벌>속의 어린 소년이 되어 비명을 지르며 군중 속을 헤치고 말에게 잘려갔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뛰어 일어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마부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쳤을지도 모른다. “왜 저 사람들은 불쌍한 말을 때린 거예요?” 그는 찢어질 듯이 아파 가슴을 부여잡고 자신의 마지막 힘을 소진했을지도 모른다. 문학은 또 이렇게 현실로 재현되었다. 엄혹한 현실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타인을 연민하며 그렇게 사그러질 것이다. 한 맺힌 인간들의 모든 슬픔을 끌어안으면서.
<살인자O남감, 출처: 넷플릭스>
인간은 누구나 악인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완전히 악하거나, 완전히 선하기만 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인간은 존재하는 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악을 행한다고 해서 그 인간을 구제불능으로 여기고 처벌하겠는 생각은 위험하다. 오히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타인을 처벌하거나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기에 항상 모든 사람을 몇 번이고 한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톨스토이의 말에 귀기울여야 한다. 이 시대에도 황제, 귀족, 법관, 상인, 소장처럼 권력과 부를 가졌으나 서로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잃은 인간을 보기란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인자 O난감> 작품 속에 나왔던 것과 같은 많은 인간말종들이 이런 사랑과 동정의 정신을 아로새길 수 있길 바란다. 어쨌든 원한감정과 심판으로는 절대 인류를 구원할 수가 없다.
<참고문헌>
니체의 삶, 수 푸리도, Be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