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벌>의 현대적 오마주 I
<출처: 넥플릭스>
1. 살인자 ㅇ난감: <죄와벌>의 현대적 오마주
어제 넷플릭스에 공개된 <살인자 ㅇ난감>이라는 드라마를 정주행 하고 있다. 요즘 내가 연재 중인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의 내용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한 드라마여서 관심이 생겼다. 어제 오픈 하자마자 시청을 완료했다. 작가가 참고한 <죄와벌>이 워낙 탄탄한 내용과 긴박한 스토리 전개를 가졌기 때문인지 이 드라마의 치밀한 구성, 묵직한 문제의식, 빠르고 시원한 스토리 전개 등이 마음에 쏙 들었다. 고전을 재해석하면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이 나오는 그런 작품이었다. 아직 <살인자 ㅇ난감>를 시청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오늘 글에서는 드라마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해 보겠다. 작품의 스토리보다는 작품에서 사용한 <죄와벌>의 주요 이슈와 상징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죄와벌, 출처: 넥플릭스>
드라마를 보니 작중 배경이 어딘가 눈에 익다. 자세히 보니 그가 유학 생활을 했다던 도시가 대전 그중에서도 유성 지역이었다. 우연이겠지만 이곳은 내가 졸업한 대학이 있는 곳이다. 주인공이 다녔다는 학교, 자취방, 아르바이트하던 편의점 등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나는 작중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완벽히 몰입해 드라마를 정주행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살인자 ㅇ난감>은 군대를 전역하고 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어느 복학생의 이야기이다. 그는 여느 대학생들처럼 일상적인 생활(학교, 자취방, 아르바이트)을 이어나간다. 그러나 그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 혼란스럽다. 아무 생각 없이 캐나다로 1년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려 하지만, 막상 돌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대안이 없다. 해도 고민, 안 해도 고민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런 생활 속에서 주인공 이탕에게는 미래는 있는 것인지. 삶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연속이다.
대학시절 나도 이런 질문들을 했었다. 불안했던 청년시절 해결되지 않는 수많은 질문 속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로를 헤메 듯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한때는 인간은 선한 목적을 위해 세상에 보내졌다 믿었었다. 책상머리맡에 ‘인류의 복지와 평화’라를 문구를 써 붙여 놓고 드넓은 세상에 나가 고통에 신음하는 인간들을 구원하리라는 원대한 꿈도 꾸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신, 선한 의지, 자유, 평화, 인류 구원이라는 말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 허무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학교에 가고, 유학을 가서 위대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면 존경받고 멋진 어른이 될 거라는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의 찬가를 부르는 동안에도 눈앞의 현실은 팍팍했다. '나는 이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며 늘 불안했었다.
2. MZ 청년의 불안과 좌절
인간은 살아가면서 추구할 궁극적 목적을 고민한다. 누군가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그는 삶을 통달한 지혜자 혹은 위인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 좋은 삶이고 무엇이 바람직한 행동인가에 대한 질문은 고대로 부터 지금까지 많은 이들을 갈증 나게 했던 화두 중 하나였다. 서양사상가들 오래전부터 이 질문을 대한 답을 해왔지만 누구 하나 명쾌한 정답을 제시한 철학자는 아직 없는 것 같다.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은 도덕의 목표가 행복이며 개인의 행복이 증폭되면 될수록 개인이 모인 집단인 사회의 행복도 증가한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한 사회의 행복 지수를 높이기 위해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요구되는 것이다. 벤담의 이론에 따르면 이 청년의 살인은 정당화된다. 쓸모없고 사악한 인간 하나를 죽임으로써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혜택을 입을 수 있다면 그것은 선한 일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매우 혼란스럽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초가 무너진 느낌이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는 현대를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기회의 불균형, 빈부의 격차, 지방소멸, 인구종말이라는 무시 무시한 단어들 앞에 기성세대는 더 이상 이기적으로 살지 말고 자신들의 억척스러움과 성실함을 배우고 도전하고 결혼하면 자신들처럼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지 않겠냐고 강요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젊은이들은 더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저성장의 시대를 살고 있는 전후 최초의 세대이다. 지금은 양극화의 심화로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붕괴되었다. 의대, 일류 대학, 대기업으로 가는 성공의 사다리는 조기 교육과 대치동 학원가로 상징되는 금수저들만의 리그로 변모한 지 오래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세대, 부모보다 가난한 첫 번째 세대, 미래보다는 지금 이 순간 소확행을 즐기는 세대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을 대변하는 설명이다. 청년들을 불안하다. 아니 불안을 넘어 분노한다. 그들은 가진 기성세대들이 야속하다. 많은 청년 세대들은 좌절했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사회로 접어들었다.
3. 어느 대학생과 청년 장교의 분노
어느 날 생활고에 시달리던 라스꼴리니코프는 노파의 전당포에 대학에 진학하면서 동생이 기념으로 선물한 붉은 보석이 세 개 박힌 반지를 저당 잡힌다. 노파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가난한 자신의 처지가 처량했는지 아니면 노파가 아주 싼값에 후려친 것 때문인지 주인공은 노파에 대해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돌아오는 길에 습관처럼 술집에 들러 보드카 한잔을 마시려 했다.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자 이상한 생각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그의 머리를 쪼아대듯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바로 옆에 앉은 대학생과 젊은 장교의 대화는 그의 심란한 감정에 기름을 붓게 한다. 조금 전에 만난 그 노파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에 따르면 그 노파는 유대인 못지않은 부자라서 단번에 5천 루블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도 1 루블짜리 전당품조차 마다하지 않을 정도의 재물귀이다. 주인공에게 그랬듯 그 노파는 단 하루라도 기한을 어기면 물건을 팔아버리고, 물건 값에 1/4 밖에 주지 않으면서 5부 혹은 7부의 고리를 받는다고 악질적 자본가이다. 나아가 노파는 여동생 리자베따를 늘 때리고 노예처럼 부리는 나쁜 언니이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전재산을 자신의 사후 추도를 위해 어느 수도원에 기부하도록 유언장을 썼다고 한다. 불쌍한 여동생 리자베따에게는 땡전 한 푼 남겨 주지 않으면서.
그들은 분노했다. 바퀴벌레만도 못한 그녀를 죽이고 도둑질한다고 해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겠노라 단언했다. 어리석고, 하찮고, 못됐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해만 끼치는 그런 병든 노파는 죽어도 싸다고 했다. 노파는 언젠가 죽을 것이므로 그녀를 죽여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싱싱한 젊은이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추모를 위해 의미 없이 수도원으로 기탁하기로 약속한 그녀의 돈은 사실은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극빈과 분열, 파멸, 타락, 성병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엄청난 돈이라 안타까워 했다. 한 사람의 생명으로 수천 명 이상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정의로운 일이 아니냐고 역설했다. 신기하게도 200여 년 전 러시아의 상황은 현재 우리의 상황과 한치도 다르지 않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금수저들은 부와 권력을 세습하고, 자기들을 위한 네버렌딩 스토리를 만들어 나간다. 이 시대의 청년들은 절망한다. 그러나 악을 단죄할 책임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하루 하루 버티며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언제가 광야에서 백마를 타고 우렁찬 말발굽을 울리며 오고야 말 초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4. 선한 양심: 적갈색 털의 연약한 말의 죽음
<니체와 토리노의 말, 출처:위키피디아>
라스꼴리니코프는 어느 날 몸살에 시달리다가 잠시 꿈을 꾼다. 꿈속에서 어린 라스꼴리니코프는 아버지와 선술집 앞을 지난다. 그는 선술집 현관 앞에 있는 짐과 술통을 운반하는 큰 짐마차를 보았다. 그 큰 짐수레를 끄는 말은 큰 짐마차와는 어울리지 않는 적갈색 털을 가진 작은 암말이었다. 가녀린 암말은 이런 무거운 짐을 끌고 가다가 바퀴가 진흙탕이나 바퀴 자국에 빠지기라도 하면 금방 기진맥진해할 정도로 연약한 말이었다. 그럴 때마다 마부는 채찍으로 말의 콧잔등과 눈까지고 가차 없이 지독하게 두들겨 팼다. 이것을 쳐다보는 어린 주인공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여원 말이 온 힘을 다해 수레를 끌어당겨보지만, 수레는 달리기는커녕 한 발자국도 대지 못하고 다리만 허우적거리며 신음소리를 낸다. 그 장면을 목격한 라스꼴리니코프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외친다. “아빠, 저 삶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빠, 불쌍한 말을 때리고 있어요.”
여원 말은 최선을 다해 마차를 끌어 보지만, 마침내 말은 계속 휘두르는 채찍에 쓰러져 갔다.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던 어떤 이가 이렇게 외친다 “도끼로 쳐야지, 그래야 단방에 죽지” 마부는 그의 외침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 쇠지렛대를 집어 든다. 불쌍한 말을 쇠지렛대로 내리쳤다. 말을 비틀거리며 주저 앉는다. 몇 차례 타격을 받은 말은 마침내 머리를 축 늘어드리고 숨을 괴롭게 몰아 쉬다가 죽어 버리고 만다.
불쌍한 소년은 비명을 지르면서, 군중 속을 헤치고 적갈색 말에게 달려가 피투성이가 된 머리를 붙잡고, 말과 눈과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뛰어 일어나,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마부에게 달려들었다. 이 순간 그의 아버지가 그를 겨우 잡아 무리 속에서 끌어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아빠, 왜 저 사람들은 불쌍한 말을 죽인 거예요?” 그는 흐느꼈다.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온다. 소리가 비명이 되어 튀어져 나왔다. 해 그리고 그는 꿈에서 깬다.
꿈에서 깬 그는 도끼로 노파의 머리를 내려 찍으려 마음먹었던 것을 후회했다. 그는 놀라면서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전율했다. 그는 자신이 살인을 감행한다면 그 일을 견디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 까지 노파 살해를 계획했던 자신의 생각을 후회했다.
그리고 T 다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 타는 듯한 눈동자를 가진 그는 기진맥진해 숨쉬기까지 힘들 정도였다. 다리를 건너면서 그는 신께 기도했다. “주여, 제 갈 길을 보여 주소서, 전 그 저주스러운 몽상을 버리겠나이다” 그는 조용히 편안한 마음으로 선명하게 불타는 석양과 강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에 한 달 동안 곪아 오던 종기가 갑자기 터진 것 같았다. 드디어 그는 노파를 살해하겠다는 미망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노파 살해의 실행과 그 반대 사이에서 끊임 없이 갈등한다. 이런 갈등하는 한 인간의 모습은 내가 마지막으로 다를 인간 본질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관의 본질이다.
5. 2*2=4가 아니다.
<수정궁, 출처: 위키피디아>
1851년 만국박람회를 개최하면서 런던에 세워진 거대한 유리 및 철제 건물인 수정궁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산업혁명의 상징물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영국식 이데올로기인 공리주의를 뒷받침 하는 강력한 결과물이었다. 신속하고 경제적이며 아름답기까지 했던 수정궁을 보며 전 세계는 열광했다. 산업혁명이 가져다줄 수많은 기술의 진보와 이익은 인류를 유토피아로 이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수정궁이 곧 깨지고 불타고 무너져버릴 산업혁명과 그 지지 이데올로기의 거짓된 권모술수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모두가 수정궁을 경외할 때 그것이 모래 위에 세운 신기루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2*2=4라는 수학적 합리적 인간관은 그 자체가 잘못된 전제인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주목한 것은 인간 그 자체의 특성이었다.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블랙박스와 같은 존재이다. 인간은 상업적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삶은 상업적 이득과 그에 따라오는 편안함 말고도 많은 변수로 구성된다.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합리화된 삶이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는 상황을 주인공의 진실한 친구 라주미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유토피아적인 사회주의가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삶을 혐오하는 분위기를 조장했다고 이렇게 비판했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의 최상의 이익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혹은 (논리를 해치지 않기 위해 더 엄밀히 말하자면) 가장 이익이 되는 이점이 존재한다. … 이는 다른 어떤 이점보다 더 주요하고 유리한 이점이 된다. 이를 위해 인간은 필요하다면 어떤 법칙도 거스를 준비가 돼 있다. 다시 말해 이성, 명예, 평화, 번영 등 온갖 아름답고 유용한 것들을 포기할 준비가 돼 있다. 그저 이 제일가고도 가장 이익이 되는, 다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이점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죄와벌, 도스토옙스키>
<죄와벌>에서 어린 라스꼴리니코프가 불쌍한 적갈색 암말을 부둥켜 안고 울던 장면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인간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때로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명백히 손해가 되는 결정도 한다. 질적 공리주의자로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 인간은 어떤 정해진 모형을 따라 만들어져서 정해진 곳에 배치되며 정해진 일을 정확히 해내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내면의 힘을 따라 사방으로 자신을 성장시키고 발전시켜 나게 되어 있는 나무와 같다… 우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자기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다가 일이 잘못되어서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자신의 선택한 길을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다.”<자유론, 존스어트밀, 민음사>
<인간은 자유롭게 뻗어나갈 나무 같은 존재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나는 밀이 제시한 질적 공리주의가 도스토옙스키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밀은 가정교육을 통해 고전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 공리주의 사상가 제레미 벤담, 프랜시스 플레이스, 데이빗 리카도 등 고전 정치 경제학 교과서의 주요 인물을 교사로 두었다. 그중 공리주의를 창시한 제레미 벤담과는 서로 방문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그는 공리주의자협회를 만든 이후 옥스퍼드 대학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거절했다. 그의 당돌한 거절 이유는 영국 교회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가 자유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 누구보다 자유의 중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자신의 양심과 의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할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내면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선한 존재 혹은 악한 존재라는 이분법적 존재로 상정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 우리가 죽여야 할 무한히 악한 인간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비록 악행을 할 수 있더라도, 언제든 그 악을 뉘우치고 선한 존재로 갱생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이 가능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에만 죄 많은 인간도 속죄와 부활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온갖 교리와 당위 속에 잊혀 갔던 세상의 빛과 소금이려고 했던 무수한 지혜자들과 시대를 앞서간 모든 이들에게 빚진 자들이다. 종교, 인종, 성별, 국가, 민족을 떠나 개인의 양심과 상관없이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면 침묵해야 하는 그런 엄혹한 시절은 더 이상 오지 않았으면 한다.
끝으로 이 시대의 청년들이 인간을 한정적인 존재로 가정해 놓고 그 위에 올려놓은 무수한 이데올로기를 맹신하며 추종하는 일은 경계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좌파 혹은 우파 이데올로기나 정치사상을 공고히 하는 구국의 대오에 합류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극단적 정치적 무관심도 문제이긴 하다.)
우리가 자유롭게 세상에 보내진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의 고유한 방식’을 따라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죄와벌>과 <자유론>에 기대어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