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신곡_지옥 제4곡 후반부
1. Note Me & Read Me
rispuose: 'Io era nuovo in questo quando ci vidi venire un possente con segno di vittoria coronatostato, Trasseci l'ombra del primo parente, d'Abèl suo figlio e quella di Noè, di Moisè legista e ubidente, Abraàm patriarca e David re, Israèl con lo padre e co' suoi nati e con Rachele, per cui tanto fè, e altri molti, e feceli beati. E vo' che sappi che, dinanzi ad essi, spiriti umani non eran salvati.'(Inferno 4:52~60)
그는 대답했다. 내가 여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승리의 관을 쓴 전능하신 분 께서 이곳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분은 최초의 아버지의 영혼을 끌어내고, 그의 아들 아벨, 노아, 그리고 순종한 율법자 모세의 영혼, 족장 아브라함과 다윗 왕, 이스라엘과 그의 아버지와 그의 자손들, 이스라엘이 많은 노력을 쏟아 얻은 아내 라헬, 그리고 수많은 다른 영혼들을 끌어내어 축복하셨다. 그들 이전에 어떠한 영혼도 구원받을 수 없었음을 네가 알기를 원한다. (지옥 4:52~60)
1-1. 구원은 현재진행형?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래하는 신에게 우리는 아무런 소용없게 된다
<칼 구스타프 융>
그리스도교의 사도신경(credo)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후, 부활하시기 전 사흘 동안 ‘죽은 자들 가운데서 계셨다’는 문구가 있다. 그 외에 다른 자세한 설명은 없으나 후대의 사람들은 이 내용을 단테가 위 본문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과 의인들을 지옥에서 구원해 내셨다는 설화가 만들어졌다. 더군다나 선악과를 탐해 인간을 타락시킨 최초의 아버지 아담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나는 단테의 상상력이 중세의 전형적인 구원관을 넘어서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라는 그리스도교의 기존 교리에 틈을 만드는 새로운 생각이다. 나아가 수많은 영혼들을 이끌어 냈다는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그리스도가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재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단 한 번의 사건,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구원받는다' 라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매우 협소한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태초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것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은 ‘의인이 하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신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줄 것을 간청했다. 하나님은 불의하고 배은망덕하며 늘 우상을 탐하던 이스라엘을 멸절시키지 않으셨다. 전지전능하신 신은 인간의 간악함과 은혜를 쉽게 져버리는 불의함을 모르셨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리스도의 비극적 죽음을 통해 사랑하는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놀라운 은총의 발로였다. 우리는 태초부터 이어진 구원의 큰 역사를 잊고, 단지 하나의 단면을 들어내어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이야기하는 편협한 시각을 거두어야 한다. 바울의 서신서들을 숭배하는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신의 심정을 나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
1-2. 그리스의 시인들, 아탈리아 창건의 주역들, 철학자들, 학자들
quelli è Omero, poeta sovrano; l'altro è Orazio satiro che vene; Ovidio è 'l terzo, e l'ultimo Lucano.
(Inferno 4:88~90)
Così vid' i' adunar la bella scola di quel segnor de l'altissimo canto che sovra li altri com' aquila vola. (Inferno 4:94~96)
I' vidi Eletra con molti compagni, tra 'quai conobbi Ettor ed Enea, Cesare armato con li occhi grifagni. (Inferno 4:121~123)
그는 견줄 자 없는 시인 호메로스요, 그 뒤에 오는 이는 풍자시인 호라티우스, 세 번째 분이 오비디우스요, 맨 끝은 루카누스가 오고 있다(지 4: 88~90)
독수리처럼 다른 시인들 위로 날고 있는 참으로 고귀한 노래를 써던 주인의 아름다운 학교로 영혼이 모이는 것을 보았다(지 4: 94~96)
많은 동료와 함께 잇는 엘렉트라, 그들 사이에 있는 헥토르와 아이네이아스 그리고, 독수리 눈으로 무장한 카이사르가 보였다. (지 4: 121~123)
단테는 종교, 정치, 철학, 자연과학에 이르는 많은 이들이 림보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여기서 단테가 주목하는 것은 베드로의 반석 위에 쌓아 올린 로마제국의 기초가 그리스의 시성 호메로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창건 서사시 아이네이스는 사실상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모티브로 쓰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네이스를 읽어 보면 알겠지만 로마를 창건하기 위해 떠나는 모험은 일리아스의 전쟁사이며 오뒷세이아의 고난과 모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길 안내자를 자처한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의 빛 속에서 이탈리아 창건의 서사를 써 내려간 것이다. 아이네이스에 등장하는 주인공 엘렉트라, 헥토르,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의 전설적인 영웅들이다. 그리스에게 트로이가 멸망당한 후 그들은 새로운 꿈을 찾아 이탈리아 반도를 향했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 아이네이스는 그들은 결국 카이사르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호메로스는 이탈리아 창건의 큰 빛을 비춰주었다. 베르길리우스가 호메로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시성들과 아이네이스의 주인공을들을 나열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일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반석(성베드로 성당으로 상징)이 되어 제국의 종교로 발돋움하는 데 있어 그리스 문학의 상상력은 큰 밑거름이 되었다.
Tutti lo miran, tutti onor li fanno: quivi vid' io Socrate e Platone, che 'nnanzi a li altri più presso li stanno (Inferno 4:133~135)
내가 살며시 눈을 들어 철학자들의 무리 사이에 앉아 계신 제자들의 스승을 보니, 모든 이가 그를 찬양하고 우러른다. 그 누구보다 그와 가까이 있는 이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었다. (지 4:133~135)
그는 철학자들을 최고의 스승으로 묘사한다. 그중 단연 최고의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모두 그를 경탄했고,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보다 더 돋보였다. 이것은 중세 스콜라철학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모든 철학자들 중 아리스토텔레스가 위대한 이유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전통에 따라 <신학대전>과 <철학대전>을 비롯한 저서들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인문학을 인간의 학문이라 말하며 터부시 한다. 나아가 인문학은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만용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학 역시 인간이 신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한 또 다른 종류의 인문학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로마에서 정교화된 그리스도교의 시작점에 호메로스 등의 서사시인들과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철학적 토대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신성시하는 바울의 전도여행도 오뒷세이아의 모험이야기를 모방한 것이라면 나를 불경하다 여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어려서부터 호메로스의 작품과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아스를 읽고 암송하며 자랐다. 그의 머리 속에 오뒷세이아가 없을리가 없다. 내 말을 인정할 수 없다면 사도행전과 오뒷세이아를 비교해 보라. 그래도 아니라면 나도 깨끗이 인정하겠다. 또한 아직도 그들이 신앙하고 고백하는 많은 교리들은 <신학대전>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매일 듣는 성당과 교회의 설교와 각종 교설들은 인문학적 성찰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오늘날 무엇을 읽고 듣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인문학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 지옥의 4장을 마무리하면서 단테가 바라보았던 인문학적 이상을 다시 한번 숙고해 본다. 그리고 철학자 최진석이 매서운 눈초리로 했던 말을 마음에 새긴다.
“배움이 습관이 되면 평생을 배우다 끝난다. 배움은 수단이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삶은 자기표현의 과정이어야 한다. 배우는 것이 습관이 되다 보면 이 표현 능력이 거세되기 쉽다. 남의 말만 듣고, 남의 말만 쫓아다니며, 남의 글만 들이 파는 일로 평생을 바친다면 이는 복종적이고 굴종적으로 사는 것밖에 안 된다. 자기표현이 부족한 것은 많이 배우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망이나 배짱이 적어서일 가능성이 크다. 야수 같은 눈빛이 살아있어야 한다. 원초적인 힘찬 눈빛이 있어야 한다. 공부는 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고, 내가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기본적인 자세를 노자는 자율이라 했다. 자율이란 내가 나를 조율하는 것이다. 대립면의 긴장을 받아들이면 이념과 신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최진석, 위즈덤하우스>
나는 인문학적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국가, 자본, 종교, 과학 등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재료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수단일 뿐이다. 우리가 이런 수단들을 의심하고 숙고하지 않을 때 이 수단들은 어느새 절대적인 것으로 우리 주변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은 모든 것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 학문이다. 주어진 가능성을 펼쳐놓고 그것의 시시비비를 따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의 삶을 꿈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내가 단테의 신곡에서 발견한 인문학적 상상이고 이상이다.
단테가 꿈꾸었던 이상은 단순히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구원받았고, 너는 지옥에 갈 것이라는 생각'은 기독교적 구원관과 거리가 멀뿐 아니라, 단테의 이상과도 큰 간격이 있다. 그는 림보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했다. 그 하나님의 은총이 적어도 인류를 위해 한평생을 바쳤던 위대한 시인들, 선량한 권력자들, 무수한 지혜자들에게 임하길 간절히 기도했다. 나아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많은 이들이 신의 은총에 힘입어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나도 오늘 2천 년 전 그리스도가 그랬던 것처럼 인간이 오직 자신만 구원받겠다는 이기심을 내려놓고, 타자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 놓을 때 너와 내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이상에 기대어 본다. 나를 죽여서 당신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나도 그 길을 가보겠다고. 그리고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의 빛 가운데로 나아올 때 까지 그 구원의 역사는 끝나서는 안 된다.
2. Remembe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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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고 자료
The Devine Comedy by Dante_Inferno, Dante Alighieri, the classic
La Divina commedia, Inferno, Dante Alighieri
신곡 지옥(인페르노), 단테(이시연 역), 더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