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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Feb 15. 2024

15. 존경하는 단테 알레기리에 전하

단테신곡_그리스 원정대 서시

존경하는 단테 알레기리에 전하

단테신곡_그리스 원정대 서시


No.1. 편지지 소인. 성남분당우체국

2024년 2월 15일


존경하는 단테 알레기리에 전하

전하의 높으신 존전에

첫 번째 편지를 올려드리나이다.


저에 대한 아무런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실 듯하여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아레테이며, 전하께서 쓰신 신곡을 통해 선생님을 처음 뵙고 흠모하는 마음에 매일 지옥편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좋지 않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한국인이라 이탈리어를 전혀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한글로 번역된 <지옥편>을 읽다가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아 선생님께서 직접 이탈리아어로 쓰신 책을 어렵게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고백할 게 있어 몇 자 올려 드립니다. 저는 원전을 읽는데 꽤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약속한 시간을 종종 어기고는 합니다. 그래도 저는 피렌체어로 쓰신 이 작품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지를 알고 있기에 한 단어, 한 절, 한 장을 더디지만 소중하게 생각하며 읽고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긴장감을 가지고 당신의 책을 대할 때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행복했었나 모릅니다. 해석이 안 되는 날에는 저의 능력을 탓하며 좌절하기도 일수이지만, 저는 이 읽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새벽 미명에 저의 서재에서 전하께서 쓰신 귀한 책을 읽을 때 저는 청명한 공기와 따뜻한 집안의 기운을 느낍니다. 저의 충만하고 감사한 마음을 말로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오늘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하! 저는 지난주 비통한 마음으로 서울 시내 서점들을 방황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저작이 거의 팔백여 년의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무수한 해설서들이 있었을 텐데 제 손에는 겨우 한 두 권 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신경과민증이 비처럼 끊임없이 제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이탈리아의 한 정신분석학자가 쓴 당신의 글과 칼 구스타프 융 선생의 이론과의 관련성에 대한 책을 한 권 얻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융은 인류의 집단무의식을 연구한 20세기의 젊은 학자인데, 선생님의 귀중한 책에서 인류의 집단 지성이라는 맥락을 발견한 듯합니다. 그 책을 손에 들고 함박웃음을 지었더랬습니다.


이 편지를 쓰기 전에 저는 수많은 불안들을 쌓아야만 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많은 밤을 괴로워했는지 전하는 상상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제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저의 기억들을 하나의 흐름 속에서 기록할 수 없었기 대문입니다. 제 기억력은 형편없습니다. 요즘 들어서 더 그렇습니다. 제 기억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정오에도 저는 잠시 전에 생각해 내고 수차례 외웠던 짧은 문장을 정확히 기록할 수 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그 문장들은 제 심연에 기록되기 전에 아직 결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과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억나는 문장을 쓰기 위해 급히 자리에 앉으면 파편 밖에 남지 않기가 부지기 수입니다. 그 파편들을 꿰뚫어 볼 수도 없으며 그 너머도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늘 심사숙고하며 제 노트에 그 파편들을 꼼꼼히 적어나가고 있습니다. 저의 이데아는 아스라이 멀리 있으나, 제 손과 발은 항상 제 곁에 붙어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릅니다. 머리가 나쁘면 손과 발을 써서라도 기억해 내고야 말겠습니다.


전하께서 계획하셨다던 그리스 여행은 잘 다녀오셨나요? 저는 아마도 이번 여름이나 가을에는 트로이와 지중해의 여러 신전들을 방문할 계획입니다. 전하의 기록들 중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그리스의 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제 마음이 계속 그리로 향합니다. 그래서 최근에 <그리스 원정대>라는 독서 클럽을 만들었습니다. 평소에 교류가 있던 지인들과 함께 독서해 오던 뉴욕의 K 선생님, 파리의 건축가, 기업 홍보 전문가가 함께 승선을 약속했습니다.


꽃피는 봄부터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그리스 신화, 비극, 역사 등을 순서대로 읽으려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곰실에 꽃이 피면, 거기서 하루 묵으며 문우들과 함께 쓴 글을 낭독할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책을 읽고 저희는 지중해의 망망대해로 출항하려 합니다. 오뒷세우스의 고난과 모험의 길, 아이네이아스의 꿈과 희망의 길을 준비한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 엄청난 문학적 상상력과 영감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이스탄불 지중해>


지중해로 출항할 생각을 하니 감개무량한 마음이 듭니다. 언젠가 아프리카 출장을 갔을 때 경유했던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의 아침이 기억이 납니다. 해 질 녘에 저는 이스탄불 구도심 외곽 주변에 가지런하게 조성된 공원 한 귀퉁이로 옛 콘스탄티노플 시대에 지어진 성벽을 되돌아왔었죠. 향기와 태양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이제는 저녁 기운으로 선선해진 공기 속에서 정신이 차분해졌고, 나른해진 육체는 충족된 사랑에서 태어난 내면의 침묵을 음미했습니다.


그때 저는 벤치에 앉았습니다. 하루가 저물어가면서 둥글어지는 지중해를 물끄러미 바라봤죠. 검은 바다가 무섭기도 했지만, 저는 그때 풍족했습니다. 그때 제 머리 위에서는 한 그루 나무가 봄의 모든 희망을 꽉 쥐고 있는 고사리 주먹처럼 오므라든 돋을무늬의 꽃봉오리들을 줄줄이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제 등 뒤에는 로즈메리가 피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에서 오로지 커피의 향기를 느낄 뿐이었습니다. 저 언덕들은 나무들에 에워싸여 액자 같은 테두리를 둘렀고, 더 멀리 바닷가에선 하늘이 정박한 돛단배처럼 가장 편안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죠. 제 가슴엔 묘한 기쁨이, 평온한 의식에서 생겨난 그 묘한 기쁨이 들어섰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모래밭에서 쉼 없이 부서지는 파도가 춤추는 금빛 꽃가루들의 공간을 관통해서 저에게 밀려오는 듯 했습니다. 바다, 들판, 이 땅의 향기를 통해 제 몸은 향기로운 생명으로 채워지고, 저는 벌써 금빛으로 물든 이 세계의 과일을 깨물면서, 그 달고 강렬한 과즙이 입술을 따라 흐르는 느낌에 압도당했지요.


중요한 것은 저도 아니었고, 세계도 아니었습니다. 세계와  사이에 사랑이 태어나게 하는  조화와 침묵만이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사랑을 오롯이  혼자만을 위해 요구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습니다. 태양과 바다로부터 태어나서 활달하고 풍류를 즐기고, 단순함 속에서 위대함을 길어 올리고, 해변에 똑바로 서서  하늘의 찬란한 미소에 공모의 미소를 던지는 종족이 있었던 거죠. 저는  종족 전체와 더불어 세계와  사이의 사랑을 공유하기로 의식했고, 거기에 자긍심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전하 이 아름다운 기억을 뒤로하고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인간이 단명할 운명이고 그리고 죽음 이후에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슬퍼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슬픈 이유는 우리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 미래의 어느 순간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먼지 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현재를 살아갈 뿐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미래는 불안하고 낯설기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싸늘하게 주검으로 마무리할 인생이고, 처참하게 맞이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 선 누구도 한 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상상력의 힘에 의지해 트로이의 해안을 거닐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명예의 상인 브뤼세이스를 빼앗긴 후 아가멤논에게 도발하기 전에 거닐었다던, 새벽 미명의 샤프란 색으로 밝아오던 그 해안가를 꼭 걸어보고 싶습니다. 인간은 욕망은 끊임없고, 이미 충분한 힘과 재력과 명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욕망에 사로 잡혀 분노했던 한 인간의 고뇌를 느껴 보고 싶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불명예는 빼앗긴 아름다운 여인도, 수많은 재물도 아닌 욕망의 관리에 실패한 그들의 마음 상태였겠지요?


이 아름다운 기억들과 꿈들이 귀하신 전하의 책을 통해 되살아난 것은 너무나 기쁜 일입니다. 당신이 보여주신 인류애적 사랑과 연민에 깊이 감동합니다. 무엇보다 매일 신과 사람과 삶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도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책 속에서 뵙지만, 조만간 <그리스 원정대>가 출항하면 전하께서 계셨던 지중해의 밤하늘을 보며 더 가까운 우정을 만끽할 수 있겠죠?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전하께 닿을 수 있기를 바라는 저의 간절한 마음이니, 예쁜 편지봉투에 ‘수령 확인’이라고 서명하는 것에 대해 화내지 마십시오.


 부디 어리석고 나약한 종을 굽어살피시어

당신의 아름답고 숭고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밝은 눈을 허락해 주소서.


진심으로 안부를 전하며 당신의 아레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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