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검증
화랑대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 매서웠다. 군복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은 생도를 단련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훈련처럼 느껴졌고, 굳은 입술 사이로 얼어붙은 숨이 뿜어져 나왔다. 에녹은 조용히 교내 도서관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표지는 닳아 있었고, 제목은 《군의 정치적 중립과 병영민주주의》였다. 1990년대 중반에 쓰인 책으로, 이미 절판된 지 오래였지만, 누군가 사관학교 서가 깊숙이 남겨둔 흔적이었다.
그 책을 손에 든 순간부터였다. 감시가 시작된 것을 체감했다. 처음엔 사소한 일이었다. 청소 구역이 자꾸 바뀌었다. 점호 시간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동기였던 임재우가 무언의 시선을 보냈고, 한때 농담을 주고받던 정태성은 말수를 줄였다. 황상민 중대장은 더 이상 에녹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에녹’은 ‘72번’이 되었고, ‘생도’라는 호칭 뒤에 붙는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야, 너 책 뭘 그렇게 많이 읽냐. 혹시… 사회과학이냐?”
내무반의 허리를 맡고 있던 이형준이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냉소였다.
“무슨 생각 갖고 있는지 다 안다. 요즘은 말이야, 군복만 입으면 다 충성인 줄 아는 시대 아니거든.”
에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자신은 의문을 품었고,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의 방향은 하나회의 역사와 권력 집중의 메커니즘을 향하고 있었다.
며칠 후, 생도대장실로 호출받았다.
생도대장 백승조 준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가운 목소리를 뱉었다.
“자네, 어디까지 알고 있나?”
“사실만 정리했습니다. 하나회 11기부터 시작된 내부 결속, 그리고…”
“조용히 해.”
백 대령이 손을 들었다.
“자네가 쓰고 있는 글. 그리고 그걸 복사한 USB. 다 보고 있다. 육사는 학문을 장려하되, 체제를 부정하는 학문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건 자네가 스스로 정한 길을 거스르는 일이지.”
에녹은 순간, 무언가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올 뻔한 말을 눌렀다.
“저는… 부정하려 한 게 아닙니다. 단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딛고 선 기반이 무엇인지.”
백 대령은 묘한 침묵을 흘리며 말했다.
“자넨 감시 대상이다. 4중대 전체가 자네를 지켜본다. 실망시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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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에녹은 내무반에서 *‘그’*가 되었다.
그는 있되 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의 자리엔 침묵이 깃들었다. 동기들은 밤마다 귓속말을 했고, 그가 들어오면 대화는 뚝 끊겼다. 식판을 나르던 김윤성이 실수로 밥을 쏟았을 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다만 에녹을 슬쩍 보며 ‘저 놈은 문제 있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에녹은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진실을 아는 것인가, 아니면 그 진실을 끝까지 붙드는 것인가?’
그 답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에녹은 알 수 있었다.
이곳, 이 학교는 이제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사상의 전장이라는 걸. 그리고 그는 그 전장 한가운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