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다
밤이 깊어지던 어느 날, 에녹은 침대에 앉은 채 육군인권센터의 익명 제보 창을 열었다. 손은 떨렸고, 창은 열렸다 닫히기를 수십 번. 그러나 결국, 그는 타자기를 두드리듯 조심스레 적어 내려갔다.
“이곳엔 과거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육사 내부엔 특정 졸업 기수를 중심으로 한 불투명한 네트워크가 존재하며, 생도 선발, 진로, 인사까지 그 영향이 미칩니다. 저는 지금 감시당하고 있으며, 생도 사이에도 입막음과 의심이 퍼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 제보가 삭제된다면, 그것 또한 증거일 것입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른 순간, 에녹은 알았다.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걸.
며칠 후, 군인권센터 공익변호인단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들은 제보의 심각성을 인지했고, 위헌적 감시 행위에 대한 헌법소원 및 민사소송 동시 제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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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소송은 빠르게 주목을 받았다. 국방부는 내부 감찰을 시작했지만, 육사는 공식 대응을 미루며 “공정한 판단을 기다리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법정은 달랐다.
에녹은 재판부에 생도복을 입고 직접 출석했다.
자신의 변호인들이 함께 했지만, 그는 말한다.
“변론의 일부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재판장은 잠시 놀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조용한 법정 안에 에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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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배석하신 판사님들.
저는 지금까지 군이라는 조직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왔습니다. 계급, 명령, 책임, 충성… 이 모든 가치의 소중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충성이 인간의 양심과 상충할 때,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이 학교에서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고등학교 시절 읽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나오는 한 문장에서 시작됐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자기 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다가 일이 잘못되어서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다.”
저는 지금, 바로 그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감시받고, 차별받고, 동료의 눈초리 속에 외롭게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제가 제 두 발로 선택한 길의 결과입니다. 만약 오늘 이 법정에서조차 제가 틀렸다고 판단된다면, 저는 기꺼이 그 결과를 감수하겠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제가 외쳤던 말들이 누군가의 기억에 남고, 이 제도가 한 발짝이라도 투명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장차 군의 지휘관이 될 사람들입니다. 저는 감시보다 용기를 지휘하고 싶습니다. 침묵보다 질문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저는 그런 사욕이 통하는 군대를 희망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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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은 침묵에 휩싸였다.
그날 에녹의 발언은 기록으로 남았고, 제복을 입은 청년의 양심이 법정에 선 첫 사례로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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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결과는 에녹의 완전한 승소였다. 육사는 비공식 감시와 지시가 있었음을 시인했고, 법원은 “군 내부의 사조직적 폐쇄성이 공공 조직의 신뢰를 침해할 수 있다”라고 판시했다. 또한, 에녹의 인격권 및 교육권 침해에 대해 손해배상과 사과 명령을 내렸다.
그는 ‘패배할 수 있는 용기’를 선택했고, 결국 승리했다.
소송에서 승소한 날 밤, 에녹은 생활관 옥상에 올라 혼자 별을 바라봤다. 싸움은 끝났지만, 누군가는 아직도 그를 향해 창을 갈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어쩐지 그날의 어둠은 예전처럼 차갑지 않았다.
그는 혼자였지만, 혼자만은 아니었다. 익명의 제보자, 기무대 제보 당시 협력했던 후배, 말없이 물을 건넸던 내무반 동기, 심지어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주던 교관까지—에녹은 다시 보게 되었다. 자신이 놓치고 있던 ‘조용한 연대’를.
소송 이후, 에녹은 점점 주변 생도들과 말을 섞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했고 경계도 많았다. 그러나 사소한 질문 하나, 교실 복도에서의 짧은 인사, 야간 자습 때 건네는 필기 노트. 그런 작은 교류가 쌓여 어느새 서로를 다시 믿을 수 있게 만들었다.
박재현은 어느 날 에녹에게 물었다.
“지금 돌아간다면… 다시 제보할 거야?”
에녹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단 한 줄도 바꾸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번엔 혼자 쓰지 않을 거야. 너희한테도 보여줄 거야.”
그 대답에, 박재현은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보였다.
에녹은 그 날 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나오는 아래 문구를 속으로 수차례 되뇌었다.
인간은 어떤 정해진 모형을 따라 만들어져서 정해진 곳에 배치되어 정해진 일을 정확히 해내는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내면의 힘을 따라 사방으로 자신을 성장시키고 발전시켜 나가게 되어 있는 나무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