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사랑의 시작

첫사랑의 추억

by 아레테 클래식

국군의 날 시가행진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군 전력이 총출동하는 이 행사는 생도들에게도 특별한 날이었다. 서울의 하늘 아래 펼쳐진 장대한 퍼레이드. 문득 멀리서 지나가던 간호사관학교의 단아한 행진 대열에 눈길이 멈췄다.


그녀는 리사였다. 고운 눈매에 또렷한 눈빛을 지닌 생도. 짧은 순간,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딱 1초였지만, 그 찰나의 시간은 마치 계절이 바뀌는 듯한 여운을 남겼다.


며칠 뒤, 우연처럼 마주친 국군의 날 행사 참여 생도 간 교류 모임에서 그들은 다시 만났다. 리사는 당당했지만, 어딘가 그림자를 지닌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환자를 살리는 간호장교로서의 사명감과,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삶 사이에서 그녀는 갈등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과로로 쓰러졌던 기억, 그리고 자신이 과연 군이라는 체계 속에서 인간적인 간호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그녀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에녹은 그런 리사를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


“정의는 총을 드는 것에만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지켜내는 마음에도 있습니다. 간호장교로서의 고민, 이해해요. 하지만 그 길은 절대 외로운 길이 아니에요.”


리사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떴다. 자신이 그토록 외롭게 느꼈던 길에, 이미 누군가 함께 걷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둘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각자의 위치에서의 훈련과 공부, 고민, 사명에 대한 이야기들이 한 자 한 자에 담겼다. 점점 더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게 된 두 사람. 에녹은 말한다.


“우리가 만난 날, 내게 새로운 사명이 생겼어요. 한 생명을 지켜내는 당신을 지켜주고 싶다는 사명.”


그리고 리사는 조용히 웃으며 속삭인다.


“나는 이 길이 두려웠는데, 당신이 있어서 이제 조금은 용기를 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들의 사랑은 불꽃처럼, 하지만 단단한 신념 위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정의와 생명, 사명과 따뜻함이 교차하는 그 뜨거운 시절의 중심에서, 에녹과 리사는 함께 성장해 갔다.


그날 이후, 에녹과 리사는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육사 생도로서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리사의 편지는 그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에녹도 어느 겨울밤, 행군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뒤, 텅 빈 훈육관 책상 앞에 앉아 그녀에게 마음을 담아 쓴 첫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리사에게

국군의 날, 퍼레이드 속에서 네가 내 앞을 지나갔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 짧은 눈 맞춤이었지만, 그건 내게 하나의 서약처럼 느껴졌어.


마치 “나는 여기 있어요. 살아 있고, 누군가의 고통을 안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듯했어. 나는 늘 싸우는 것만이 정의인 줄 알았는데, 너를 보고 처음으로 ‘지키는 것’도 정의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


사람을 살리는 손, 고통을 덜어주는 눈빛, 그리고 그 모든 걸 감당하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해 나가는 너의 모습이 내게는 칼보다 강하고, 방패보다 단단해 보여.


너의 고뇌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다면, 나는 그걸 선택할 거야.


언젠가 이 편지를 너에게 건넬 수 있을까?

그날이 오기를 바라며, 이 작은 행간에 나의 마음을 실어 본다.

– 화랑대에서, 에녹



리사는 며칠 뒤, 조심스레 그의 편지를 받아 들고, 침상에 앉아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가운 야간 훈련 후에 손끝은 얼어 있었지만, 편지를 읽는 동안 그 손끝이 점차 따뜻해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


“나 혼자가 아니구나…”


그날 이후, 그들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기 시작했다. 정의와 생명의 길을 걷는 서로 다른 존재였지만,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에녹에게

네 편지를 읽고 눈을 감았어.

그러면 네가 곁에 있는 것 같아서,

훈련이 끝난 후 어두운 병영 한편,

내 심장이 네 문장을 따라 조용히 울었어.

에녹, 네가 내 마음을 그렇게 정확히 꿰뚫어 볼 줄 몰랐어.


난 사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옳은지 모르겠어.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배웠지만,

어느 날은 명령과 치료 사이에서

누군가의 생명을 숫자로 계산해야 하는 순간이 있어.

나 스스로가 의무복무자가 아니라

정복을 입은 군인이란 사실을 잊고 싶을 때가 있어.

그런데 네가 말했지.

"진군보다 부축을 먼저 배우는 사람"이라고.

그 말이 나를 다시 붙잡아줬어.


전장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사람을 지키겠다고 마음먹는 게

진짜 용기라는 걸, 너를 통해 알았어.


고마워.

나를 겁쟁이라고 느끼던 순간에도

너는 내가 강하다고 말해줬지.

네 사랑이 내게 그렇게 다가온다는 걸

이제야 알아.


나도 너를 사랑했었고,

지금은 더 깊이,

나의 가장 투명한 부분으로 사랑해.

– 지운대에서 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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