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 잃은 군대
9월의 햇살은 그리 덥지 않았지만, 연병장 위로 쏟아지는 빛은 도리어 생도들의 등을 태웠다. 에녹은 군모를 깊게 눌러쓰고 대열의 간격을 재확인했다. 발끝 간격, 어깨와 어깨 사이의 정렬은 손끝 하나로 맞춘다. 단 한 걸음, 단 한 박자라도 흐트러지면 전 대열의 균형이 무너진다.
“중대, 분열 앞으로 가!”
구령이 하늘을 찢듯이 울리고, 생도들의 구두굽이 동시에 땅을 찍었다. ‘쾅!’ 하고 퍼지는 소리는 절도 그 자체였고, 그 한 박자에 모든 피로가 박제되어 있었다.
땀은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고, 예복은 이미 땀에 젖어 색이 변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 행사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앞에 선 육사의 이름이자, 그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무대였다.
에녹은 숨을 삼켰다. 대열을 맞추는 일은 군인의 모든 훈련 중 가장 단순해 보였지만, 동시에 가장 잔인한 훈련이었다. 그것은 인내의 반복이었고, 개별성의 소거였다. 수백 명의 발끝이 같은 속도로 나아가는 그 순간, 인간은 잠시 사라지고 부대만이 남는다.
“하나, 둘! 셋! 넷! “
구령에 맞춰 오른팔이 뻗고, 구두굽이 균일하게 연병장을 쳤다. 3개월째 이어진 분열 연습. 오전에는 정렬과 속도 맞추기, 오후에는 장비 착용 후 실전 모의, 밤에는 영상 복기와 비평. 국군의 날에 중앙청 앞을 지나는 1분 30초를 위해, 생도들은 수십일을 갈아 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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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반에 돌아온 동기들이 말했다.
“야, 오늘은 팔에 근육이 찢어질 것 같다…”
박재현이 침상에 기대며 말했다. 모두들 말없이 통풍기 근처에 앉았다. 발끝에 피멍이 올라 있었고, 오른손 손목은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래도 누구 하나 훈련이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에녹은 조용히 얼음찜질을 꺼내 후임의 팔에 얹어주었다.
“이게 훈련이라면, 나중에 실전은 얼마나 더할까.”
누군가 툭 내뱉었고, 그 말에 모두 조용해졌다.
“실전은… 총 대신 시선으로 사열당하는 거겠지.”
에녹이 말했다.
“우리가 누구인지, 이 나라가 믿을 수 있는 존재인지. 그걸 단 90초 동안 보여주는 거야.”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말없이 붕대를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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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아침, 모든 장비는 완벽히 정비되었다. 광택제로 윤을 낸 구두, 바람에 나부끼는 태극기, 발맞추는 소리 이외에는 그 어떤 잡음도 허용되지 않는 침묵의 대열.
드디어, 광화문 앞.
“부대 차렷!”
에녹의 목소리가 구령보다 먼저 날을 세웠다.
수천 명의 시민과 고위 장성,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육사 생도들은 발끝을 맞췄다.
“대통령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육군사관학교 생도 대열을 선두로 수천 명의 병력이 일제히 오른손을 들어 이마에 붙였다. 정열 된 제복, 칼같이 맞춘 발끝, 그 일사불란한 경례에는 3개월을 갈아 넣은 땀과 고통, 자존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대통령의 답례는 지체되었다.
사열대 위, 국군통수권자는 잠시 멈춰 선 듯했다. 몸은 앞을 향하고 있었으나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경례를 받아야 할 그 순간, 그는 아무 말도, 아무 몸짓도 하지 않았다.
순간, 연병장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구령 없는 정적.
수천 명의 병력이 ‘충성’이라는 한 마디로 멈춰 있는 사이, 초침이 몇 번이나 흘렀다.
박재현 생도가 숨을 삼켰다.
“이거… 뭐지?”
뒤편 대열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왜… ‘부대열중쉬어’ 구령이 안 나와?”
제병 지휘관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급히 구령을 외쳤다.
“부대, 열중쉬어!”
착—
정적을 깨는 구령이 울리고 나서야 병력들은 자세를 풀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몇 초의 침묵은 마치 균열처럼 대열을 가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눈을 내리깔았고, 누군가는 고개를 저었다.
사열대 위 대통령은 미소 지으며 연설문을 펼쳤지만, 에녹의 눈에는 그 모습이 공허하게만 보였다.
‘그는 경례를 모른다. 아니, 군을 모른다.’
대통령의 첫마디가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졌지만, 그 순간 생도들 사이엔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들은 박수도, 환호도 하지 않았다.
예복 안의 셔츠가 땀에 젖어들었고, 뻣뻣하게 올린 팔이 여전히 저릿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허탈했다. 몇 달간 준비했던 그 ‘90초의 절정’이, 한 사람의 무관심과 무지로 인해 삐걱거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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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나는 오늘, 국가란 게 참… 멀게 느껴졌다.”
누군가 이불을 덮은 채 말했다.
박재현이 조용히 덧붙였다.
“대통령이 병력을 통제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지휘하는 거지?”
에녹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통수권자가 경례를 받지 않는다면, 그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군에 대한 무지이자 무시야.”
“우리는 그 몇 초를 위해 몇 달을 걸었는데 말이야…”
생도들은 서로를 보지 않고,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날 이후, 생도들은 군기가 아니라 상처 난 자존심으로 더 조용해졌다.
그러나 에녹은 또다시 다짐했다.
“어쩌면, 진짜 군이란 이런 순간에 드러난다. 흔들리지만 무너지지 않는 것. 명령을 넘어, 사명으로 서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