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손기태
지난주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를 읽고 그전에 읽은 에티카, 신학정치론을 많이 오독했음을 깨닫고 철저하게 반성했다. 역시 초보에게는 좋은 가이드가 필요하다. 더군다나 큰 산을 오르면서 경험도 장비도 없이 그냥 오르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내놓은 일이 아닌가? 어쨌든 이 책을 읽고 누구보다 데카르트를 잘 알았으므로 데카르트를 넘어서는 철학을 할 수 있었고, 홉스의 사회계약설을 바탕으로 사회계약이 아닌 자연의 법칙이 국가와 공동체를 운영하는 원리여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시킨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있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지 않고, 반성적으로 이해하고 극복했던 스피노자를 통해 철학함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는다.
그중 아래 에티카의 대목이 나의 심장을 찌른다.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행하지만, 예속된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행하며 원치 않는 일을 행하게 된다.’(에티카 4부 정리 66 보충)
최근 독서량이 늘어남에 따라 궁금증이 극에 달했었다. 묵혀 두었던 철학사, 사상사를 다시 펼치면서 나의 부족한 기초를 깨닫고 ‘읽어야 할 책들’이 많다는 사실에 조급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각 철학자들의 주장을 모르고, 그 흐름이 어떤지 모르고서는 철학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접근 방식은 점점 나를 조급하게 하고, 알 수 없는 중압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나의 무지와 무능을 끝없이 확인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지쳐갔다. 에티카의 정리에 따르면 나는 이 순간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예속된 인간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행하고, 원치 않는 것을 행하는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나의 욕망과 능력의 한도 안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나의 독서는 알아야 하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또 알고 싶은 것을 찾아 떠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학교에서의 공부도 그렇지 않았나? 바람직한 것들이기에 또 의무감에 했던 그 많은 공부들은 더 이상 공부하기 싫었던 수많은 이유 중 가장 큰 이유였다. 내가 알고 싶은 것과 또 내가 잘 아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나의 공부가 되어야 한다.
얼마 전 다시 읽었던 ‘몰입’에서도 같은 말을 했었다. 우리가 오랜 시간을 교육받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배움을 포기하는 이유는 정규 교육 과정 속에서 경험한 ‘당근과 채찍’에 대한 불쾌한 기억 때문이다. 외적 동기에 의한 학습을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나의 자율성과 내적인 동기에서 공부하기 시작해야 한다. 아마추어 독서가로서 내 공부의 목적은 더 이상 학점을 받거나 졸업장을 타는 것, 그리고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 그리고 자기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바로 여기서 나는 소소하지만 심오한 기쁨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나의 어떤 말보다 스피노자의 아래 정리와 증명이 자유로운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표현하기에 인용해 본다.
‘예속적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그저 운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거나, 자신보다 강한 능력을 지닌 개체에 압도되어 그저 수동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속적이 될수록 무엇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인지를 판단할 능력을 잃으며, 이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그저 맹목적인 채로 남아 있고, 자신의 능력이나 활동을 확대시키지 못한 채로 무수한 단절과 실패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에티카 4부 정리 증명)’
그래!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