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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다시 쓰는 몸과 마음의 이야기

몸을 살리기 위해 다시, 움직인다

by 아레테 클래식

요즘 나는 카페 일을 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몸으로 살아간다. 이른 아침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것은 커피이다. 그라인더와 에스프레소기계를 세팅하고, 냉장고 안의 재료를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의자 탁자를 청소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매일 반복되고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하루에도 수백 번 팔을 들고, 다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나는 내 몸을 ‘쥐어짜듯’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점심 무렵이면 어깨가 뻐근하고, 다리는 무겁고, 손가락 관절마저 욱신거린다. 감정은 피로를 따라 무기력해지고, 생각은 점점 침전물처럼 가라앉는다.


그 무렵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몸이 견디지 못하니, 마음이 먼저 꺾인다는 것을. 마치 몸이 뿌리인 채로 말라가는 나무처럼, 아무리 정신을 다잡아도 피로한 몸이 나를 무너뜨리는 순간이 오고 있었다. 어느 날, 퇴근 후 주저앉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며 결심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그때부터 나는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처음엔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움직임이었다. 턱걸이 하나를 하겠다고 철봉 앞에 서면, 팔이 무겁고 어깨가 저려 쉽게 올라가지 않았다. 달리기를 해도 폐는 금방 차오르고, 자전거를 타도 다리는 금방 풀렸다. 그러나 그날그날 단 5분이라도 꾸준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이 흐르자, 이상한 변화가 찾아왔다. 잠이 조금씩 깊어졌고, 아침에 덜 우울해졌으며, 저녁이 되면 피곤함 대신 가뿐함이 남았다. 나는 내 몸이 무너지고 있었음을, 그리고 운동이 그 폐허 위에 조금씩 기둥을 세워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몸’과 ‘마음’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철학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왔는가? 수천 년간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해 온 철학의 지혜는 내가 일상에서 몸소 겪은 고통과 회복의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 데카르트의 분리: 이성의 오만, 몸의 침묵


17세기 근대 철학의 시작점에 서 있는 르네 데카르트는 인간 존재를 ‘생각하는 존재’, 즉 정신적 주체로 정의했다. 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인간이 사물과 구별되는 이유를 이성적 사고 능력에 두었다. 데카르트는 이에 따라 인간을 정신과 육체라는 두 개의 실체로 나눴다. 정신은 자유롭고 이성적인 주체이며, 육체는 연장된 기계적 장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 두 실체가 뇌 속의 송과선(pineal gland)이라는 기관에서 상호작용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실험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철학자의 신경해부학적 상상력에 불과했다.


오늘날 우리는 데카르트가 그린 이 도식이 삶의 실체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아침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며, 피곤한 하루를 반복하면서 느끼는 그 ‘살아있는 감각’은 단지 정신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몸이 아니다. 몸은 그 자체로 느낌을 갖고, 기억하며, 아파하고, 또 회복한다. 내가 운동을 시작했을 때 회복된 것은 단순히 근육만이 아니었다. 의지, 희망, 내면의 리듬이 함께 되살아났다. 데카르트의 이분법은 이러한 복합적인 현상을 온전히 포착할 수 없다. 그의 이원론은 몸을 정신의 하위 개념으로 전락시켜, 몸이 가진 고유한 지혜와 생명력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치 영혼이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플라톤의 사상처럼, 데카르트는 몸을 폄하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절반을 외면했다.


2. 니체의 전환: 몸에서 시작하는 외침


이 철학적 전환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강렬하게 외친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그는 인간을 ‘정신이 거주하는 육체’로 보는 이원론적 시선을 강하게 비판했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너의 자아라 불리는 것, 그것은 너의 몸이다. 네 몸은 더 크고 더 위대한 지혜다.”


여기서 니체는 ‘자아’라는 것이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몸의 총체적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인간의 감정, 생각, 의지는 결국 육체의 리듬, 생동성, 고통과 쾌락의 역사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니체는 철학이 대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늘을 향한 추상적인 형이상학이 아니라, 흙을 밟고 서 있는 몸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사유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몸을 통해 세상을 느끼고, 반응하며,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생명력의 원천으로 보았다. 그는 몸이야말로 진정한 지혜가 깃든 곳이며, 정신은 단지 몸의 도구일 뿐임을 강조했다:


“그대들은 정신을 경배하지만, 그 정신은 몸의 도구에 불과하다. 도구 위에 더 높은 것이 있음을 잊지 말라.”


언젠가 읽은 이 문구는 내 삶에 깊은 파문을 일으켰다. 무너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들려하지 말고, 무너진 몸을 일으켜 세우는 일부터 시작하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회복의 철학이라는 것을, 나는 고통 속에서 절감하고 있었다. 니체는 몸을 단순한 생물학적 유기체가 아닌, 삶의 모든 의미와 가치가 싹트는 토양으로 이해했다. 그의 철학은 몸의 지혜를 존중하고, 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3. 메를로퐁티의 ‘살’: 몸으로 세계를 안다는 것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니체의 문제의식을 더욱 깊이 있게 질문한 사상가이다. 그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인간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살(le chair)’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살은 단순한 육체(flesh)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을 감각하고, 지각하고, 움직이며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실존의 장이다. 그의 현상학은 몸이 단순히 정신의 지배를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능동적인 주체임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몸은 내가 세계와 접촉하는 방식이며,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살아있는 창이다.”


우리는 눈으로 본다기보다 몸 전체로 본다. 음악을 듣는 것도 단순히 귀의 기능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동을 느끼며 감정을 일으키는 경험이다. 커피잔을 쥔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기, 숨을 들이마실 때 폐와 갈비뼈에서 퍼지는 감각은 모두 세계와의 교감을 가능케 하는 ‘몸의 언어’다. 몸은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의미를 생성한다.


나는 메를로퐁티의 이 말을 읽으며 나의 일상을 다시 되새겼다. 커피를 내리며 바삐 움직이는 몸, 무의식 중에도 공간을 스캔하고 손님과 반응하는 나의 몸은 단지 기계가 아니었다. 지각하는 주체로서의 몸, 경험하고 판단하며 선택하는 몸이었다. 그래서 몸이 무너지면 마음도 함께 붕괴되고, 다시 몸이 회복되면 감정과 사고, 관계의 흐름마저 회복되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우리가 세계와 분리된 채 사고하는 순수 의식이 아니라, 몸을 통해 세계에 정박’(anchored)되어 있다고 보았다. 우리의 모든 경험과 인식은 몸을 통해 매개되며, 몸은 그 자체로 의미를 담고 표현하는 존재인 것이다.


4. 스트레스 반응 이론: 신체의 긴장이 곧 심리의 긴장이다


현대 심리학은 이러한 철학적 통찰을 생물학적으로 명확히 확인해 준다. 한스 셀리에(Hans Selye)의 스트레스 반응 이론에 따르면, 모든 스트레스 상황은 신체적 반응을 수반한다. 스트레스는 단순히 ‘마음이 불안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신경계, 호르몬계, 면역계가 총동원되는 전체 유기체의 위기 대응이다. 몸은 외부의 위협에 대해 생존을 위한 일련의 반응을 보이며, 이는 정신적인 측면뿐 아니라 물리적인 측면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셀리에는 스트레스 반응을 세 단계로 설명한다:


* 경고기: 스트레스 자극이 가해질 때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고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이 분비된다. 심박수 증가, 근육 긴장, 호흡 가속화 등이 일어나며, 몸은 ‘투쟁-도피’(fight-or-flight) 반응을 준비한다. 이는 단기적인 위협에 대한 생존 반응으로, 몸의 에너지를 비상하게 동원하는 단계이다.


* 저항기: 몸이 자극에 적응하며 안정된 반응을 시도한다.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이 일시적으로 증가하지만,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에너지가 점차 고갈된다.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몸은 지속적인 경계 상태를 유지하며 피로가 누적된다.


* 소진기: 만성 스트레스에 의해 면역계가 약화되고, 우울, 불안, 무기력, 신체 질병이 동반된다. 몸의 방어 체계가 무너지면서 다양한 정신적, 신체적 문제가 발생한다. 심각한 경우 만성 피로 증후군, 번아웃 증후군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스트레스는 단지 마음의 병이 아니라 몸의 병이다.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기초 체력이 없으면, 정신은 쉽게 무너진다. 몸과 마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유기적으로 반응하는 하나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5. 운동: 몸을 돌보는 일이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해답은 명료하다. 운동하라. 꾸준히, 몸의 리듬을 따라. 운동은 단순히 칼로리를 소모하고 근육을 키우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뇌와 신경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정신 건강을 증진시키는 강력한 도구이다. 운동은 세로토닌, 도파민, 엔도르핀 같은 행복 유도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한다. 이 호르몬들은 기분을 좋게 하고, 스트레스를 줄이며, 통증을 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시에 뇌 속의 시냅스 연결을 강화해 우울과 불안을 완화한다. 심박이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리듬은 감정의 파동을 안정시키고,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회복시킨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운동을 통해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 즉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이 회복된다는 점이다. 작은 성취들이 쌓이면서 자신감을 얻고, 이는 삶의 다른 영역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나는 매일의 운동 속에서 삶의 감각을 되찾는다. 턱걸이를 한 번 더 할 수 있을 때, 달리기에서 이전보다 오래 뛸 수 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체력 향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을 다시 움켜쥐는 감각이었다. 몸의 변화가 정신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몸을 돌보는 것이 곧 마음을 돌보는 것임을 깨달았다. 운동은 회복 탄력성을 높여주고, 우리가 삶의 어려움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나가며: 마음을 치유하려거든, 먼저 몸을 움직여라


운동은 단지 건강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회복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며, 우리가 자신을 되찾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의 신체는 고장 나버린 감정의 언어를 통역할 수 있는 또 다른 언어이며, 우리가 너무 오래 외면해 온 진실의 터전이다. 마음이 나를 속일 때, 몸은 진실을 말해준다.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가 다시 깨달아야 하는 시대이다. 스트레스로 가득한 일상 속에서, 마음을 고치려 애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되돌아봐야 할 것은 ‘몸’이다. 우리는 삶이 복잡해질수록 더 많은 설명을 찾으려 하지만, 때때로 설명은 고통을 줄이지 못한다. 설명보다 더 빠르고 더 강력한 치유는 움직임 속에서 시작된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에게 조심스레 묻고 싶다. 요즘, 아무것도 하기 싫고, 무기력하며,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짜증을 내고 있지는 않은가? 모든 것이 귀찮고, 도무지 삶에 흥미가 붙지 않는 그 상태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단언컨대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몸’이 멈춰 있는 탓일 수도 있다. 심리적 우울이나 불안, 의욕 저하 같은 증상은 종종 신체의 움직임이 부족할 때 먼저 찾아온다. 많은 이들이 마음의 상태를 바꾸기 위해 독서나 명상, 타인과의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 이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몸을 돌보는 일이다.


아무리 고귀한 철학도, 아무리 깊은 사유도, 무기력한 몸 위에선 작동하지 않는다. 니체는 “너의 영혼도 너의 몸과 더불어 춤을 추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었다. 그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 던져져야 한다. 몸이 가라앉아 있으면 영혼도 주저앉는다. 우리가 다시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 시작은 철학적인 통찰이 아니라 매일의 규칙적인 움직임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루에 단 10분만이라도 땀을 흘려야 하는 이유다. 심박수가 오르고, 폐가 확장되며, 근육이 탄력 있게 반응하는 그 생생한 감각이 뇌와 마음에 어떤 변화를 불러오는지 체험해 보라. 그것이 곧 회복의 시작이다. 생명은 ‘움직임’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살리고 싶다면, 우선 몸을 깨워야 한다. 철학자 메를로-퐁티가 말했듯, 나는 내 몸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고, 그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을 다시 만들어간다.


운동은 선택이 아니라 회복의 조건이다. 무기력은 정신의 결함이 아니라 생명의 에너지 고갈이라는 신호일 수 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당신이 지쳤다면, 괴롭다면, 우울하다면, 혹은 사소한 것에도 이유 없이 짜증이 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걷고, 달리고, 뛰고, 팔을 벌리고, 숨을 들이쉬는 그 단순한 행위들이 다시 당신을 삶 속으로 데려올 것이다. 그러니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라. 당신의 신체가, 곧 당신의 가장 진실한 자아다. 그리고 그 자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회복력이 크며, 당신의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할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당신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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