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관점주의를 중심으로
1. 들어가며: 세계정신과 관점주의
근대 철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하는 칸트 이후부터, 독일 철학의 화두는 ‘물자체’였다. 그리고 그중 주요한 학자는 단연 헤겔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헤겔은 ‘세계정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아직 알 수 없는 것’과 ‘앞으로 알게 되는’ 과정의 변증법을 주장했다. 지금 당장은 어떤 것이 본질인지 알 수 없으나 역사적 변증법의 결과로써 ‘물자체’는 세계정신으로 변주된다.
그렇다면 이 세계정신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헤겔을 독일 나치즘의 인종주의 및 전체주의의 사상적 선구자로 지목했다. 헤겔이 직접 영향을 주지 않았더라도, 법이나 역사 철학적 그의 이론이 나치의 득세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얘기할 수 없다.
그는 '개인이란 세계정신'이라 얘기했다. 개별 인간의 이성은 세계정신에 정말 사기당하고 있다고 믿으라면 세상살이는 너무 암울하다. 21세기에 코로나로 고통받고 또 전체주의와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것도 참 슬픈 일이다.
칸트, 헤겔 등 근대 철학자 중심의 전통적 철학자들이 아직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철학계에도 시대를 거스르는 새로운 기운 싹트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반항아는 단연 니체라고 수 있다. 니체는 자신의 이론을 통해 당대의 철학 사상을 주름잡던 칸트, 헤겔 등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관점주의이다.
세계의 가치는 우리의 해석 속에 있다는 점(단순한 인간적 해석 이외에 다른 해석들도 어디선가 가능하다는 것), 지금까지의 해석들은 우리가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 생명, 즉 힘에의 의지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관점주의적 평가들이라는 점, 인간의 모든 향상은 편협한 해석들의 극복을 수반한다는 점, 힘의 강화나 증가는 새로운 관점들을 열어놓고, 새로운 지평들을 믿게 한다는 점. 이런 생각이 나의 저작들을 관통하고 있다. 《유고: 1885년 가을~1887년 가을)》
위 글에서 니체는 세계의 가치를 해석하는 인간의 해석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다. 결국 칸트가 발명해낸 ‘물자체’는 인간의 정신 위에 군림하는 절대정신이 아니라 인간 정신이 진정한 실재 자체가 아니냐는 반문인 것이다. 나아가 니체는 칸트의 물자체란 것이 결국 인간적 해석의 결과일 뿐, 인간 이외의 다른 종들이 가지는 해석까지 그 범위를 넓혀 생각해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니체의 관점주의(perspectivism)는 생물종마다 고유한 현상 세계가 있고, 이는 인간의 감성과 오성과는 다른 표상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는 이론이다.
니체의 이런 주장을 칸트나 헤겔이 알았다면 어땠을까? 니체는 그의 저서 우상의 황혼에서 기존의 사상들이 주장하려 했던 이데아, 물자체, 절대정신이라는 개념은 마치 개념들의 미라(Begriffs-Mumien)와 같은 것이라 혹평한다. 개념을 우상 숭배하는 이런 철학자들이야 말로, 개념을 죽여서 박제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들이 숭배했던 평화, 자유, 진리와 같은 개념들이야 말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날조시킨 철학적 개념의 대가로 인류는 엄청난 값지불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2. 러시아 침공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선
나는 니체가 주장한 관점주의를 염두에 두고 이번에 발생한 러시아 침공에 대한 몇 가지 시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어쩌면 복잡하게 니체의 관점주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21세기를 대전의 암울한 안갯속으로 몰고 간 이 전쟁의 참상을 똑똑히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침략 전쟁의 원흉으로 지목받고 있는 푸틴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권력을 장악한 급진주의자들은 반헌법적 행위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추적하고, 그야말로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정치인, 언론인, 사회적 인사들을 조롱했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했습니다. 학살과 폭력, 세간을 시끄럽게 하지만 아무 처벌도 없는 살인의 물결이 우크라이나 도시들을 덮쳤습니다. 평화적 반대 시위 참석자들이 도륙당하고 노동조합의 집에서 산채로 타 죽었던 오데사의 끔찍한 비극을 떠올리면 절로 몸서리가 쳐집니다. 이런 만행을 저지른 범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알고 있고 그들을 처벌하고, 찾아서 재판에 넘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마이단은 우크라이나를 민주주의와 진보에 더 가깝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후 민족주의자들과 그들을 지원했던 정치 세력들은 상황을 완전히 교착상태로 끌고 갔고, 우크라이나를 내전이라는 나락에 빠뜨렸습니다. 그 사건이 있고 8년 후 우크라이나는 분열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푸틴 대통령의 2월 21일 연설 전문 중>
푸틴의 2월 21일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연설의 요지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이며(푸틴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국가의 형태로 존재한 적이 없다고 주장), 현재 우크라이나의 권력을 장악한 일부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우크라이나는 학살, 폭력이 자행되는 아노미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푸틴은 네오나치즘의 패악과 만행으로부터 러시아 민족을 구하기 위해 이 성전을 시작했다는 것이 이 연설의 요지이다. 푸틴의 연설을 몇 번이나 읽고 있노라니 그는 정의의 사도이고, 폭력 전쟁이 아닌 해방 전쟁을 위한 그의 결단이 사뭇 달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정말 네오나치의 폭압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을 구원할 민족 해방 전쟁일까? 우리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또 다른 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 백과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키이우 루시(913세기), 갈리치아-볼리니아 공국(1114세기), 카자크 헤트마나테(1718세기), 크름 칸국(1518세기) 등의 나라들이 존재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 공산주의 정부가 하르키우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1939년 폴란드령이었던 갈리치아 동부와 볼리니아 서부가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었다. 1941년 6월 독일군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했으나, 독일의 패배로 소련이 우크라이나의 모든 영토를 차지했다. 1991년 8월 고르바초프에 반대해 일어난 공산당 강경파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우크라이나 의회는 독립을 선포했고, 1991년 12월 국민투표를 통해 법률을 제정했다. 12월 소련이 붕괴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국민 중 우크라이나인은 전체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우크라이나어는 슬라브 어군에 속하며, 러시아어•벨라루스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약 20%를 차지하는 러시아인이 가장 큰 소수민족이다. 그 밖의 소수민족으로는 유대인•그리스인•루마니아인•아르메니아인•집시•헝가리인•타타르족•추바슈인•리투아니아인•바슈키르인•카자크인 등이 있다.
어떤가? 러시아와 유럽 사이 그리고 크림 반도에 위치한 우크라이나의 형국이 한반도의 처지와 많은 닮아 있지 않은가? 나는 이 짧은 객관적인 역사 기술에서도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우리 한민족이 겪은 침략과 항전으로 점철된 역사가 오버랩된다. 이것은 나만의 착시일까? 그리고 우크라이나 인구의 70%는 우크라이나인이다. 인구구조상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일부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인구의 20%를 구성하고 있는 소수민족이라고 국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소수민족은 이미 러시아의 도움으로 분리 독립 전쟁 중에 있었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과 같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가 일부라는 말은 매우 제한적인 시대적 사건 속에 국한된다. 오랜 역사 속에서 우크라이나는 자주 국가로 존속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자주독립 국가인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것은 현대의 국제 질서에 비추어 정당화되기에는 너무 빈약한 근거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즘 문제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2020년 3월 일 푸틴이 “우크라이나 지도부는 네오나치”라고 주장하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유대인이며 그의 할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맞서 싸웠고 홀로코스트로 친척들을 잃었다는 답변으로 응대했다. 이것의 진위 여부를 둘째로 하더라도, 돈바스 분쟁지역에 우크라이나 민병대 형식으로 투입된 네오나치의 만행은 물론 잘 알려져 있다. 실제 우크라이나에서 정보 책임자로 네오나치가 임명되기도 했다. CIA의 네오나치 지원설도 있었다.
그러나 전지적 우리 시점에서 구한말의 상황을 직시해 보자.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 민족 내부에 얼마 많은 정치적 입장과 분파가 존재했었는가? 민족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무정부주의 등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믿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행동하며, 독립 투쟁의 길을 가지 않았던가? 우크라이나의 집권 세력의 폭압적 탄압은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키겠다는 정치적 결심은 우크라이나의 다수 대중들의 생각과는 큰 괴리가 있고 결코 지지 받을 수 없는 정치적 선동에 가깝다.
정의와 자유의 수호라는 큰 틀 안에서 국가 간의 견해가 이렇게 상반될 수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머리 아프게 칸트, 헤겔, 니체를 들먹이며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한 시대의 사건을 바라볼 때 이런 복잡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그것을 왜곡하거나, 오판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3. 니체, 이데올로기의 참상을 목도하다.
다시 니체로 돌아가 보자. 니체는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의 전쟁이 가져올 결과를 걱정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끔찍한 단순화’의 전형이었다면, 이제는 비스마르크가 나폴레옹을 바짝 추격하며 독일을 대표하는 ‘끔찍한 단순화’의 전형으로 보였을 것이다. 모든 독재자는 범죄적 영웅 심리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생각은 그를 잠 못 들게 했다. 비스마르크는 이제 잔인할 뿐더러 물질 만능주의에 사로잡혀 대량 살상과 끝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니체는 프로이센이 파리 공성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잔인함과 무자비한 만행에 치를 떨었다.
이 전쟁은 파리가 프로이센에 점령당한 이후에는 무자비한 학살로 심화되었다. 전투로 발생된 포로뿐 아니라 파리의 공직자, 성직자를 막론하고 무고한 시민들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나갔다. 어느 학살이나 마찬가지로 이 무자비함은 문화적 광기로 이어졌다. 역사적 건축물들이 파괴되고, 궁전, 박물관, 각종 예술품들이 약탈되었다. 니체는 파리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인간 학살과 문화적 파괴에 치를 떨었다. 아래는 니체가 자신의 친구 게르스 도르프에게 이렇게 편지의 내용이다.
’ 파리에서 일어난 참사 소식을 듣고 며칠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의구심에 휩싸여 있었다네. 그렇게 빛나는 예술 작품들, 심지어 한 시대의 모든 작품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모든 학문적, 과학적, 철학적 업적과 예술 작품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나는 그동안 예술의 철학적 가치에 내 신념을 걸었어. 예술이 그저 불쌍한 인간을 위해 존재해선 안 된다고, 더 높은 의미의 어떤 사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고통스럽게 느껴져도 그 잔학 무도한 인간들을 향해 돌을 던질 수는 없었다네. 그들은 그저 일반적인 죄를 지닌 사람들일 뿐이니까.’
4. 나가며: 절대정신의 폭력성, 너와 나의 위버멘시
도덕적 절대주의나 정치적 이데올리기의 허구성에 대해 니체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인간은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대체 얼마나 단순한지도 검토해보자. 현실은 우리에게 기뻐 날뛸 정도로 풍부한 유형들을, 지나칠 만큼 풍부한 형식들의 유희와 변화를 보여준다 : 거기에다 대고 “아니야 !인간은 달라야만 해’라고 어떤 불쌍한 게으름뱅이 도덕주의자가 말할 것인가? 주정뱅이이며 위선자인 그도 심지어는 자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벽에 자기 모습을 그려놓고 “이 사람을 보라!”라고 부르 짖는다. 그러나 도덕주의자가 단지 개개인만을 대상으로 해서 “ 너는 이러저러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비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각 개인은 미래와 과거로부터의 운명이며 , 앞으로 도래할 것과 앞으로 될 모든 것에 대한 또 하나의 법칙, 또 하나의 필연성인 것이다 그에게 달라지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에게 달라지라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마저도, 그리고 실제로 인간이 달라지기를, 즉 덕이 있기를 원했으며, 인간이 그들을 닮기를, 즉 위선자가 되기를 원했던 시종일관한 도덕주의자들이 있었다 : 그러기 위해 그들은 세계를 부정했었다! 웬만한 미친 짓이 아니다! 불손한 뻔뻔스러움이다! 매도하며 유죄 판결을 내리 는 한에서 도덕은 그 자체로서는 삶에 대한 고려나 배려나 의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동정해서는 안 되는 특정한 오류이자, 말할 수 없이 많은 해악을 유발시킨 퇴화된 자들의 특이 성질이다! .
<우상의 황혼, 니체>
니체가 자신의 책 우상의 황혼에서 비판하는 것은 절대정신이나 보편적 개념과 같은 위선적 도덕주의이다. 니체는 개인의 양심도 절대정신의 시녀일 뿐이라는 헤겔의 주장에 단호히 반대할 것이다. 세계정신은 역사 발전의 결과로 얻어진 통찰이지 개별자들의 이성의 배후에 존재하는 절대적 진리일 수 없다. 개인의 정신은 세계정신의 한 매체를 넘어 다양하고 창의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것만이 세상의 실체이고, 그 다양한 개별자들의 활동과 관계의 결과로써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다. 선후관계가 뒤바뀐 것이다. 이론이 먼저가 아니라 자연과 사람과 삶의 실존이 먼저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언제든 삶을 유린당하고, 무시당하고, 핍박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독재자들에게 자유정신의 자리를 내어 주고 말 것이다.
사상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그것을 맹신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세상은 절대 좋은 게 좋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구획이 그어지면 나머지는 청소해야 할 바이러스가 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대의와 명분을 얘기하며 선량한 이웃을 오늘도 학살하고 있다. 다만 나도 침묵의 동조자가 되어 아침 조간에 뜬 이데아의 헤드라인을 보며 아무런 감각 없이 숫자를 세고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이 미친 세상에 제정신을 갖고 사는 것은 허위일지도 모른다. 하여 나는 나의 방식으로 오늘도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을 수많은 약자와 침략받는 공동체를 도울 이념과 명분을 찾는 나만의 전쟁을 한다. 나만의 힘으로 초극하고, 오늘도 새로운 위버멘시가 되어 나와 너와 우리의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알릴 것이다. 이 시대의 큰 아픔을 치료할 더 입체적인 강력한 관점들로 초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