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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속삭임, 영원회귀

니체의 사상

by 아레테 클래식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해


1881년 여름 니체는 실스마리아에 있는 실바플라나 호수를 산책하던 중 피라미드 모양의 바위 앞에서 위대한 <영원회귀> 사상을 생각해냈다. 이후 약 1년 6개월의 시간을 거쳐 1883년 2월 그가 슐포르타 졸업을 위한 논문을 작성할 때 그랬듯, 단 열흘 만에 『차라트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의 1부를 일필휘지로 완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니체의 후기작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알려진 이 책에는 니체 철학의 대표적인 개념들이 서사시 처럼 묘사된다. 그는 자신의 주저로 평가되는 『차라트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자신의 중심사상인 힘에의 의지, 위버멘시, 영원회귀 등을 잠언 형식의 문학적인 수사를 빌어 표현했다. 그중 영원회귀는 니체의 철학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삶의 매 순간과 모든 순간이 조금도 바뀌지 않은 채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다소 파격적인 개념이다. 아래의 내용을 살펴보자.


만약 어느 날 낮, 혹은 밤에 당신이 가장 깊은 고독을 느끼고 있을 때, 악마가 조용히 다가와 이런 말을 전한다면 어떨까.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살아야 할 것이다. 끝없이 반복해서. 새로운 것은 전혀 없고, 모든 고통과 모든 즐거움, 모든 생각과 한숨, 네 삶에서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이 반드시 네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똑같은 차례, 똑같은 순서로. •••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가 계속 뒤집히고, 모래 알갱인 너도 같이 뒤집힐 것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중)


사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무서운 악마의 저주였다는 생각이 실로 놀랍다. 이것의 사실 관계를 떠나서 실제로 현생의 삶이 영원히 계속되다면 당신은 어떨 것 같은가? 그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 삶을 무한히 반복한다면, 그 영생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영원회귀를 생각하는 순간 영원이라는 개념과 그것의 어마 무시한 무게를 실감했다. 새로운 것은 전혀 없고, 모든 고통과 모든 즐거움, 모든 생각과 한숨이 똑같은 순서로 내게 다시 되돌아온다는 영원의 종신형을 선고받은 순간 나는 억겁의 저주에 눌려 가루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이 영원한 원형적 시간의 순환을 통해 니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란 말인가?


불행히도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차라트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핵심 사상이지만 이 책에서는 이론적인 개념 정리나 친절한 설명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면 동일한 경험의 영원한 회귀라는 현상이 근본적으로 삶에 실재할 수 없기에 니체 자신도 이 사상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어려웠던지, 아니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회귀를 듣는 누구라도 이 신박한 사상이 실재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원의 개념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화두로 존재했었다. 그것은 플라톤 이래로 완벽한 개념과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고자 갈망했던 지혜 있는 자(철학자)들의 열망이었을 수도 있고, 현실의 고난을 내세의 영원한 나라로 승화하려 했던 종교의 지향점일 수도 있다. 불행히도 세상 어디에도 영원한 것은 개념으로만 있을 뿐 영원이라는 시간과 영원이 존재하는 공간에 대한 증거는 입증된 바 없다. 많은 이들이 그 구원을 믿는다고 확신한다해도, 그것이 신앙의 힘을 빌려서 확신할 수 있을 뿐이라면 나는 이또한 영원한 내세에 대한 믿음이 개념일 뿐이란 증거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영원회귀가 그렇듯 영원한 것에 대한 인류의 열망도 결국 개념적 수준의 설명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희망이나 기쁨도 영원히 지속된다고 전제한다면 그것이 정말 기쁜 일이 될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는 어떤 삶의 내용이나 형식도 무의미한 니힐리즘의 극단적인 틀 속에 가두어 버리는 불멸의 형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니힐리즘이고, 인류가 받을 수 있는 최악의 저주인 것이다.


Stupid, it’s not ‘Ewige Wiederkunft des Gleichen’, it’s now and here!

그렇다면 니체는 왜 이토록 무서운 형벌을 생각해 냈을까? 그리고 이것을 통해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영원한 시간이란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개념 아닌가? 우리를 초월한 그 영겁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지 상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반복되는 질문 속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니체의 ‘무한회귀’ 사상의 정수는 무한히 반복하는 영겁의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을 선고받은 인간이 디디고 서 있는 지금 그리고 여기(now and here)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위대한 반전을 꿈꿀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그 유명한 말처럼 인생은 욕망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우리는 그렇게 욕망과 권태를 반복하며 단 한 번의 삶을 연명하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한낱 그림자 같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오늘날 나와 너의 과거이고, 일상이고, 미래 아닌가? 그러나 영원회귀라는 그 영원의 시간 앞에 ‘여기 지금’ 나와 너의 삶은 다른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 영원한 시간은 지렛대처럼 작용하여 삶의 그 모든 잔혹함과 권태, 아름다움과 찬란함을 더욱 애잔하게 만드는 것이다. 삶이 한순간일 수밖에 없으므로, 현재 주어진 시간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충실하게 살아보는 것 그것이 니체가 저주받은 우리들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 아니었을까?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 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나는 사실 영원회귀라는 것이 도저히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 그리고 인생은 참 가볍고 덧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동전의 양면이고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깃털과 같은 찰나의 시간이든 영겁의 무게든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나에게 이러한 삶을 참아내고 살아내야 하는 이유를 찾으라면 나의 삶이 바로 찰나와 같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마치 태어남과 동시에 사형 선고를 받은 인생이다. 언젠가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유한한 삶 앞에서 우리는 서로의 처지를 연민하는 그런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오늘 나만의 실바플라나 호수를 산책하며, 나의 차라투스트라 바위 앞에서, 나만의 영원회귀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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