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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Jan 14. 2024

작가노트: 나로 존재할 용기

부제: 실존주의를 넘어 24-01-14


프롤로그

글을 쓴다는 것은 미지를 세계를 향한 여정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찾아가는 여정인 것 같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얘기한 것처럼 자기를 찾는다는 것은 왜이리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었을까? 작가일기는 읽고 쓰며 느낀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한 나의 몸부림 같은 초벌 작업을 남긴다. 비록 완성된 글은 아니지만, 부끄럽고 미숙한 여러 사유들이 온전한 글로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1.   Read Me(본것)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오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분노를

아카이오족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 주었으며

영웅들의 수많은 굳센 혼백들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인간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날부터

이렇듯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도다.

<오뒷세이아, 호메로스(천병희 역), 소나무>


비탄에 잠긴 많은 괴로움을 보낸 그 모든 밤

나의 마음속 깊은 지속이었던

두려움은 조금씩 진정되었다.


심해에서 해안 밖으로 나와

쉽게 변하고 위험한 물을 향해 몰을 뒤로 돌리고

가쁜 호흡을 하는 표류자처럼


아직도 공포에서 도망치는 내 영혼은

결코 살아 있는 사람을 보낸 적이 없는

완성된 여정을 다시 되돌아보려고 몸을 돌렸다.

_<신곡(지옥), 단테(이시연 역), 더클래식>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험은 위험한 것이다. 어째서인가? 모험을 하면 잃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모험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현명하다. 그러나 모험을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잃는다. 모험을 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잃어버리는 일이 없었을 자신 자신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너무도 쉽게 잃는다. _<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


등불은 꺼지지 말고,

음악은 항상 연주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할 테니

어둠의 공포에 질린 아이들은

행복과 선함을 전혀 알지 못한다.

<조지오웰의 유원지 중, 존재의 용기, 폴틸리히(차성구 역), 예영>  



1950년대 초에 실존주의에 관하여 들은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그 용어는 전후 유럽의 이국적인 지적 의기소침의 냄새를 풍겼다. 그것이 카뮈(Camus)와 사르트르(Sartre)의 절망적인 작품의 바탕이 된 서구 문명의 폐허에서 발생했다는 느낌을 준 것이다. 이미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야만적인 도시의 건축, 피카소의 기괴한 그림, 운율을 무시한 ‘현대’ 시, 음악의 무조성, 사회적 협약의 전반적인 해체와 같은 모든 현상들은 과도기에 접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조적인 절망에 빠져 있는 문화의 증상들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존재의 용기, 폴틸리히(차성구 역), 예영


2.   Note Me(쓸 것)

 유럽 최초의 서사시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로 시작해 중세, 근대, 현대 인문학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은 ‘존재란 과연 무엇인가?’였다. 근대의 찬란한 진보를 보며 인류는 희망에 들떴지만, 2차 대전을 경험한 이후 철학, 문학, 예술 등 인문학 정신은 철저히 파괴되고 유린되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신은 더 이상 계시하지 않으며, 고대하던 메시아에 대한 열망은 한갓 유사종교의 세기말적 해프닝으로 치부될 되었다. 부모 잃은 고아와 같은 인류는 어떤 희망과 용기로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이제 인류에게 희망은 사라져 버린 것일까? 필멸하는 아킬레우스의 운명과 고향을 잃고 방황했던 오뒷세우스를 위해 여신은 다시 노래하지 않을 것일까?  진리를 위해 평생을 고뇌했으나 ‘비탄에 잠긴 괴로운 밤을 보낸’ 무수히 죽어간자들에게 다시 한번 용기를 갖고 자신을 찾아갈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광야의 외침’은 더 이상 유효할 수 있을까? 까뮈와 사르트르는 진정 절망을 전파하는 유럽의 유령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럼에두 불구하고, 이 잿빛 폐허 앞에서라도 등불은 꺼질 수 없고, 음악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기억하자. 너와 나는 기쁘고 슬픈 매일의 경험과 실존적 핏빛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

나는 슬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Tristis, Ergo sum).


3.   Remember Me(더 깊은 넓은 사유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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