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 수레 Dec 17. 2022

란제리가 생각나는 추운 겨울

직업으로서의 란제리

백화점 여성복 판매층(Floor)에서 내가 처음으로 담당한 파트는 '란제리(Lingerie)' 파트였다. 지금은 왠지 '란제리'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 당시에는 자주 쓰였던 단어였다. 

백화점 입사 전에는 란제리 판매 구역으로는 쑥스러워서 발을 못 옮겼다. 내가 여성 란제리 판매와 관련된 일을 할 것이라 고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백화점 판매사원의 호객행위가 있던 시절이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국내 내의업계 양대 라이벌인 비비안과 비너스가 한 명의 고객이라도 더 매장에 유입시키고자 매장 앞에서 지나가는 고객을 불러 세우는 모습이 흔할 때였다. 지금은 사라진 모습이다. 

  

비비안과 비너스, 트라이엄프, 바바라, 와코루, 그리고 주병진이 만든 제임스 딘 같은 브랜드가 2000년대 초반 백화점 란제리 코너에 주요 브랜드였다 란제리 판매사원의 호객행위가 극심하던 시절에 총각 남성 혼자서 백화점 란제리 파트를 통과해나가기란 어지간한 강심장 또는 취향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못했다.


란제리 파트 플로어 매니저가 되고 나서는 아침 출근하고 나서 저녁 퇴근까지 매일 보는 것이 란제리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제품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제품 소재 및 품질을 확인하기 위해서 제품을 찬찬히 만져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직업이 아니라면 '변태'성향의 남자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백화점 고객상담실을 통해 내려오는 '진상 컴플레인 고객'을 응대하는 것도 플로어 매니저의 업무 중 하나다. 진상이라는 단어의 원래 뜻은 왕에게 귀중품이나 수라상을 올리는 것을 뜻하였는데, 진상이라는 명목으로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는 행태가 자주 일어나자 진상 떤다는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백화점에서는 진상고객을 심심치 않게 만나지만 가끔은 상식을 뛰어넘는 진상고객을 만나기도 하였다. 

'고객상담실'에서 담당 직원이 고객 불만을 접수하고 고객에게 설명 및 조치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무작정 “책임자 나오라고 해 또는 점장 나오라고 해”라고 고함을 치는 고객 역시 드물지 않다. 그때는 담당 파트매니저가 소환된다. 


고객상담실 컴플레인의 주요 발생원인은 ‘판매사원의 불친절’과 ‘사용제품의 하자나 불량’ 때문이다. 몇 번은 착용했을 듯 한 란제리 제품을 들고 와서 불량이라면서, 제품을 집어던지는 중년의 진상 고객 앞에서 다시 란제리를 들어서 테이블 위에 놓고 제품 불량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할 때도 있었다. '이건 그냥 제품일 뿐이야"라는 직업의식으로 상담에 임했지만 제품이 란제리인지라 참 겸연쩍게 생각한 것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란제리 파트 매니저가 남자일 때 겪는 고충이다. 


지금은 없어진 풍습 같지만, 취업을 하여 첫 월급을 받으면 부모님께 내복을 사드리는 것이 관습일 때가 있었다. 이삿날에는 짜장면 시켜 먹는 것과 비슷했다. 

언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첫 월급 타면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내복 그중에서도 빨간 내복으로 전했다. 겨울에는 내복 여름에는 통풍이 잘 되는 모시 메리야스 등이 인기 선물이었다. 

빼빼로데이에는 막대과자, 화이트데이에는 빨간 장미와 립스틱을 선물하게 된 것이 제조사들의 광고 마케팅의 힘이 컸던 것과는 조금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풍요롭지 않던 시절에는 보온과 위생이 취약했을 테니 그만큼 내복이 갖는 의미가 풍요로운 지금보다는 컸을 테다. 새 내복을 입으시고 건강하시라는 의미가 담겨있을 것이다. 


부산경남지역을 비롯한 영남지역에서는 재미있는 풍습이 있었다. 

“개업 집서 빨간 내복을 사면 운수대통”이라는 속설이 있어서 신규 오픈한 백화점의 빨간 내의를 구매하기 위해 Open Run이 일어나고 매출도 수십억 발생하기도 하였다.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도 모르고 근거는 없지만 속설을 믿고 수백,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   '운수대통'이라는 속설은 근거는 없지만 의외로 강력하다.   


비비안, 비너스로 대표되는 한국 토종 란제리 또는 내의 브랜드 등은 매출이 매년 감소되고 사세가 약화된다고 한다. 유니클로나 캘빈클라인, 게스 같은 글로벌 의류회사의 언더웨어에 잠식당하고, MZ세대들은 해외직구나 온라인에서 개인 취향에 맞는 다양한 언더웨어 브랜드를 구매한다. 계절의 변화처럼 란제리 브랜드도 성장 쇠퇴를 한다.  


2022년 12월은 그 여느 해보다, 겨울 한파가 매서운 것 같다. 올해 여름은 폭우로 기록되는 해였는데, 겨울 동장군의 위세도 대단하다.  란제리와 내복 매출은 추운 겨울이, 그중에서도 성탄절이 있는 12월이 가장 피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모니터 화면 아래 날씨 기온 표시는 영하 8도이다. 오늘도 무척 춥다. 이렇게 추운 날씨일수록  내복 단단히 입고 마음은 따뜻한 세밑을 모두가 보내기를 소망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은 친일파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