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점을 찾기가 참 힘들다. 일과 삶, 자신과 타자의 인생, 정신과 육체적 균형 등 등... 어느 것에 무게가 많이 실리면 중심점은 무거운 쪽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살기 위해 먹는 데, 먹이 구하는 일이 전면적인 것이 되어 개인을 매몰시켜 버린다. 자신이 부과한 가중치도 아닌 데, 사회적 무게 중심은 이를 무시하며 수시로 옮긴다. 요행히 그 중심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타인의 것에 실려, 그가 휘청거리기만 하면 덩달아 그러하거나 아예 추락해 버린다. 그러니 제 무게 중심을 단단히 잡으라고? 마주 선 타자같지만 뒤돌아 서 있는 이 타인은, 그나마 간신히 딛고 있는 중심마저 해체하기 일쑤이다. 균형은 위치를 조정하면, 코끼리와 마주 보면서도 체중이 겨우 45kg에 불과한 사람 사이에서도 이루어진다. 그 한 점을 빼고 나면, 확보할 다른 점이 없다. 이 갸날퍼 보이는 아가씨를 교체하며, 이번에는 고릴라를 반대편에 앉히면, 그 중심은 이동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코끼리가 갖는 지렛대 (척도 역할을 하듯, 자(scale)를 닮았다!)는 수 많은 타자와의 중심을 이동시키고, 때로는 아예 대면하지 못할 물리력을 행사한다.
2. 코끼리가 잣대 새 한 마리가 날아 앉아 우연히 그 잣대 무게 중심을 맞춘들, 균형이 이루어 졌다고 하기에는 어째 우스꽝스럽다. 물론, 이 새같은 존재가 그 수평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뒤집어 보면, 코끼리는 이 조그만 새가 없으면 제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추락해 버린다. 그러니 이 여린 새의 역할은 얼마나 막강한 가? 코끼리가 얹혀 있는 그 모습이, 이 연약해 보이는 새의 잠재력같은 이미지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게 중심은 코끼리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코끼리의 권력은 그 잣대에서 나온다. 누가 아슬아슬하게 그 균형점에 얹힐 것인가?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한 관심사이며, 그 마저도 잣대에 기어 오르지도 못하는 존재들이 수두룩하다. 그럼 그 지렛대를 폐기해 버리면 되지 않는가? 오직 그 저울을 통과한 존재만이 사냥터에 입장할 자격이 부여되는 현실에서는, 코끼리 등에 엎혀 승인을 받을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3. 우린 제법 무거워요 개미 한 마리가 코끼리 등에 엎혀 다리를 건널 때, "흠! 우리 땜에 다리가 많이 흔들리는군!"과 같은 우화가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런 착각을 할 수 있기라도 한다면, 그나마 다행스런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서 소수와 다수의 개념은 역전된다. 다수가 모여, '첫째,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다. 둘째, 냉장고 문을 닫는다.'라는 코끼리 냉장고 구겨넣기 농담이 있듯이, 자조적인 냉소가 뒤따르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세상의 우화는 이런 숱한 패러디를 갖고 그 어두운 면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철학이다. 잔뜩 이마를 찡그리며, 온 신경을 집중시키며 들어도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고리타분함을, 얼마나 통쾌하게 전복시키는가? 그래서, 균형이란 개념은 우화에 가깝다. 그럼에도 코끼리 등에 얹혀 살아야 하는 것처럼, 그것을 향해 출렁다리를 만드는 것처럼 여기고 사는 것이다 오늘도 간신히 그 다리를 지나왔는 지는 모르겠다.